“외도, 투병…”
고비를 넘기며 지켜온 부부의 유대
엄앵란과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로, 1960년대와 70년대를 풍미한 스타 커플이다. 엄앵란은 1957년 ‘단종애사’로 데뷔해 청순한 이미지로 청춘스타 반열에 올랐고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하며 스크린 속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 주연을 맡으며 ‘국민 커플’이라 불렸던 두 사람은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영화 밖에서도 부부로서 인연을 맺었다. 각각 한국 영화계에서 수십 편의 작품을 남긴 전설적 배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너무 다른 당신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의 첫 만남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였다. 당시 신성일은 갓 데뷔한 신인 배우로 연기 경험이 거의 없어 자신의 연기를 두고 “엉성하기 짝이 없던 발연기였다”고 설명했다.
반면 엄앵란은 이미 청춘스타의 자리에 올라 있던 실력파 배우였다. 연기 경험의 차이 때문인지, 엄앵란은 신성일과의 촬영 내내 짜증을 숨기지 못했고 신성일 역시 그녀의 불만 어린 표정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어색했던 첫 만남은 두 사람에게 남다른 추억이 되었고 52편의 영화를 함께 촬영하며 어느새 영화계의 대표 커플로 자리 잡았다.
1964년, 두 사람은 당대 톱스타로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이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약 4,000명이 모여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 두 사람의 일상은 점차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성일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잡곡밥과 담백한 반찬으로 건강 관리를 해왔지만, 엄앵란은 늦은 아침에 쌀밥과 간이 강한 음식을 즐기며 각자의 생활 패턴을 고수했다.
서로 다른 성향 탓에 1975년부터 별거 생활을 시작했고 별거는 그들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엄앵란은 신성일을 ‘동지’라고 표현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와 함께한 세월을 존중했다.
인생 동지
이 ‘동지’라는 표현은 원망과 연민, 애정과 다짐이 뒤섞인 말이기도 했다. 결혼 생활 중 신성일은 자서전을 통해 외도 사실을 고백하며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혼하지 않았고 소문이 돌 때마다 엄앵란은 “우리는 이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심심하면 이혼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교과서대로 살 수는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자신과 신성일의 관계를 두고 “각자의 길을 존중하며 동지로서의 관계를 지켜가겠다”고 했다.
2016년 엄앵란이 유방암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오랜 별거 생활을 정리하고 신성일은 엄앵란의 곁으로 돌아와 직접 간호를 도맡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한 집에서 함께하며 ‘별거 아닌 별거’ 생활을 이어갔다. 서로의 곁을 지키며 관계를 회복해 가던 중, 지난해 신성일이 폐암을 선고받으면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 엄앵란은 수천만 원에 달하는 병원비를 기꺼이 부담하며 “내 남편이니까 책임져야 한다. 작은 병실에 있는 건 못 본다”고 말하며 그를 위해 VVIP 병실을 준비했다. 신성일이 퇴원하던 날, 그가 계산을 하겠다고 하자 엄앵란이 이미 병원비를 모두 지불했었던 후였다고.
신성일이 세상을 떠나고 엄앵란은 그의 빈소에서 “우리의 관계는 동지였다”고 이야기하며 그와의 인연을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