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버지와 두 동생을 위해
초등학생 때 가장이 되었던 그녀
원더걸스 출신 솔로 가수 선미의 원래 꿈은 교사였다. 초등학생 시절 전교 회장을 맡을 만큼 모범생이었던 그녀가 돌연 연예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할 만큼 지병이 악화되었다. 어머니의 부재 때문에 어린 동생 둘과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되었고, 그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선미는 혼자서 서울을 오가며 여러 기획사 오디션에 도전했고, 초등학교 6학년이던 시절 SM 오디션에서 외모짱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JYP 오디션에 합격하며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연습생이 된 선미는 어린 동생들을 뒤로 하고 홀로 서울에서 꿈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이 자리했다.
“아빠는 나에게 자주 문자로 투정을 부리곤 했다. ‘너무 힘들다’, ‘먼저 갈 것 같다’고 하셨다”는 그녀의 회상처럼,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가족을 위한 꿈이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아빠 먼저 간다’는 문자를 받고도 연습 중이던 선미는 답장을 미뤘다. “또 투정이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음 생에도 내 딸로 태어나줘.” 답장을 하지 못했던 죄책감은 선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녀는 “데뷔를 3개월만 더 일찍 했더라면 아버지가 내 무대를 보셨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선미는 14살의 나이에 원더걸스로 데뷔했다. 데뷔곡 ‘Irony’부터 시작해 ‘Tell Me’, ‘So Hot’, ‘Nobody’까지 원더걸스는 연이어 히트곡을 내며 전성기를 달렸다.
특히 ‘Nobody’로는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100 차트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뒤에서 선미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두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고 부모 역할까지 떠맡은 그녀는 심리적으로도 크게 흔들렸다. 2010년, 그녀는 활동 중단을 선언하며 학업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선미는 2013년 솔로 가수로 복귀했다. 첫 솔로 싱글 ’24시간이 모자라’로 대중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그녀는 원더걸스의 재합류와 해체 이후에도 독보적인 여자 솔로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가시나’, ‘보라빛 밤’ 등 히트곡을 내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작사·작곡·프로듀싱에도 참여하며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입증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너무 일찍 데뷔해서 자아가 형성될 시기를 차 안에서 보냈다”는 고백처럼, 어린 시절의 상처는 마음 깊이 자리했다. 선미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은 적 있다고 고백해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수로서 성공을 이루며 선미는 두 동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녀는 “가족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며 효녀이자 ‘동생 바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아버지가 못 이룬 가수의 꿈을 내가 대신 이뤘다”는 말로 음악에 대한 진심을 드러냈다.
한때 가족을 위해 시작했던 가수의 길은 이제 그녀 자신을 위한 꿈으로 자리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는 그녀의 말처럼, 선미는 이제 온전히 자신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