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아라비아가 아시아 정유 시장의 사실상 기준 유종인 아랍라이트(Arab Light)를 6년 만에 처음으로 할인 판매하기로 했다. 2000년 이후 월간 기준 최대 인하폭으로, 원유 시장의 판도 변화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사우디 국영 아람코는 7월 6일(현지시간) 8월 인도분 아시아향 아랍라이트 공식판매가격(OSP)을 한 달 만에 배럴당 11달러 인하했다. 이로써 아랍라이트 가격은 역내 벤치마크인 오만·두바이유 평균보다 배럴당 1.50달러 낮은 ‘마이너스 스프레드’ 구간으로 진입했다.
아랍라이트가 벤치마크 대비 할인 거래되는 것은 2020년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이며, 2015년 미국산 셰일 견제, 2020년 러시아와의 가격 인하 경쟁에 이은 세 번째 할인 국면이다.
11주 만에 21달러 붕괴…호르무즈 재개방이 引火
이번 인하의 직접적 배경은 미국과 이란의 잠정 평화합의(MOU)다. 양국은 2026년 6월 중순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이란산 원유 수출 제재 한시 면제 등 14개 항을 골자로 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다. 합의 직후 그동안 분쟁 위험을 반영해 형성됐던 ‘리스크 프리미엄’이 빠르게 소멸하면서 브렌트유 선물은 하루 만에 4% 이상 하락해 배럴당 84달러 수준까지 밀렸다.
실물 시장에서도 걸프산 원유 물량이 단기간에 급증하며 가격 압박이 가중됐다. 아랍라이트의 오만·두바이유 대비 스프레드는 5월 배럴당 +19.50달러, 7월 +9.50달러를 거쳐 8월 -1.50달러로, 11주 만에 총 21달러가 무너졌다.
아시아 수요 쟁탈전…가격전쟁과는 다른 성격
아랍라이트는 한국·일본·중국 정유설비 대부분이 이에 맞게 설계돼 있는 대표 유종이다.
르네상스 에너지 어드바이저스의 아메드 메흐디 애널리스트는 “이번 인하는 가격전쟁 신호라기보다 호르무즈 정상화 과정에서 생긴 스팟 물량 홍수를 흡수하고, 중국 수요를 다시 끌어오기 위한 경쟁력 확보 차원”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일부 에너지 애널리스트들은 사우디가 아랍라이트 스프레드를 11주간 21달러나 낮춘 것을 두고 “중국 시장에서의 구조적 수요 상실을 인식한 조치”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이미 일부 아시아 바이어들은 인하 이후에도 “역내 현물 원유보다 여전히 비싸다”며 추가 인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한국 정유사 원가 완화 기대…가격전쟁 비화 여부가 변수
단기적으로 한국·일본 등 장기 계약 비중이 큰 아시아 정유사들은 아랍라이트 OSP 인하에 따른 직접적인 원가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으로 운송 리스크가 낮아진 것도 정제 마진 개선에 긍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리스크 요인도 상존한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이란·러시아 등의 할인 물량 증가와 중국 수요 성장세 둔화가 겹칠 경우, 사우디의 이번 할인이 타 산유국의 추가 할인 경쟁을 자극해 사실상의 가격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현재 사우디는 OPEC+ 합의에 따라 공급 쿼터를 점진적으로 늘리는 중으로, 생산량 확대와 가격 인하를 동시에 진행하는 이 전략이 OPEC+ 내부 결속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시장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미·이란 합의의 60일 유예기간이 종료된 이후 협상 향방에 따라 호르무즈 리스크 프리미엄이 재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