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노코리아가 야심 차게 선보인 준대형 크로스오버(CUV) ‘필랑트’가 출시 석 달 만에 판매 절벽에 직면했다. 국내 출시 첫 달인 올해 3월 4,920대로 정점을 찍은 뒤, 4월 2,139대, 5월에는 1,201대로 급감했다. 단 3개월 만에 월 판매량이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같은 회사 선배 모델들과 비교하면 이 수치의 심각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중형 SUV ‘그랑 콜레오스’는 2024년 9월 출시 후 3,900대→5,385대→6,582대로 3개월 연속 상승 곡선을 그렸고, 아르카나(XM3)는 2020년 출시 직후 4개월 연속 5,000대 이상을 유지했다. 필랑트의 급격한 하락세는 르노코리아 신차 역사에서도 이례적이다.
플래그십 상품성도 못 넘은 ‘CUV의 벽’
필랑트는 브랜드 플래그십답게 동급 최상의 기술 사양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행 상황에 따라 댐퍼 감쇠력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주파수 감응형 댐퍼(SFD)를 전 트림에 기본 적용했으며,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ANC)과 전면·1열·2열 사이드 이중 접합 차음 유리도 전 트림 기본 탑재했다.
인포테인먼트 측면에서도 SKT 생성형 AI ‘에이닷 오토’를 국내 최초로 탑재해, 단순 명령 수행을 넘어 대화 맥락과 발화 의도까지 파악하는 지능형 서비스를 구현했다. 차량 안내 앱 ‘팁스(TIPS)’는 챗GPT와 연동해 차량 사용법을 대화형으로 안내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문제는 이 탁월한 상품성이 근본적인 수요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큰 차’ 선호 시장에서 낮은 전고가 발목
필랑트의 전장은 4,915mm로 그랑 콜레오스(4,780mm)보다 135mm 길다. 그러나 낮은 무게 중심으로 세단급 승차감을 구현하기 위해 전고를 1,635mm로 낮춘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됐다. 그랑 콜레오스(1,680mm)보다 45mm, 현대차 팰리세이드(1,805mm)보다 무려 170mm 낮아, 전시장에서 나란히 세웠을 때 체감 크기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업계 관계자는 “승차감을 원하는 소비자는 세단으로, 공간감을 원하는 소비자는 SUV로 넘어가면 그만”이라며 “해치백이 국내에서 반복적으로 외면받는 것과 같은 구조적 문제”라고 짚었다.
시작가 4,331만 원이라는 가격대는 내부 경쟁도 심화시킨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동일 브랜드 내에서 더 낮은 가격에 공간이 넓고 차체가 높아 보이는 그랑 콜레오스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2029년 로드맵, 위기의 방파제 될 수 있나

르노코리아의 위기는 필랑트 한 모델에 그치지 않는다. 2026년 1~5월 누적 판매는 2만 8,733대로 전년 동기 대비 25.3% 감소했으며, 5월 한 달 내수 판매도 2,893대에 머물렀다. 현재 필랑트·그랑 콜레오스·아르카나 3종에 불과한 라인업 빈곤이 수요 회복의 근본 걸림돌이다.
한편 니콜라 파리 르노코리아 사장은 지난 4월 기자간담회에서 2029년까지 매년 1종의 신차를 출시하는 중장기 로드맵을 공개했다. 국내 선호도가 높은 D세그먼트(중형)·E세그먼트(준대형) 중심으로 파트너사 협업을 통해 개발 기간을 2년으로 단축한다는 계획이다. 2028년에는 부산공장에서 자체 순수전기차(BEV) 생산을 재개한다. SM3 전기차 단종(2020년) 이후 8년 만의 복귀다.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전략도 병행한다. 필랑트에 탑재된 에이닷 오토·챗GPT 연동 기술을 기반으로, 생성형 AI를 고도화한 SDV를 이르면 2027년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이미 부산공장은 폴스타 4 위탁생산을 위해 2025년 내연기관·하이브리드·전기차를 동시에 소화하는 혼류 생산 체제를 구축해, ‘제조 플랫폼’으로서의 생존 전략도 현실화하고 있다.
필랑트의 부진은 단순한 신차 실패가 아니라, ‘한국 시장에서 중간 차체 콘셉트는 통하지 않는다’는 구조적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례다. 르노코리아가 2029년 로드맵을 차질 없이 실행하고, 국내 소비자 선호에 부합하는 D·E세그먼트 신차를 적기에 투입할 수 있을지가 브랜드 생존의 핵심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