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출 호황으로 기업의 달러 곳간은 역대 최대로 불어나고 있지만,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달러가 넘치면 환율이 안정된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26일 발표한 ‘5월 중 거주자 외화예금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말 국내 외국환은행의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은 1,122억5,000만 달러로 전월보다 15억7,000만 달러 증가하며 두 달 연속 늘었다. 이 가운데 달러화 예금은 955억6,000만 달러로, 한 달 새 22억4,000만 달러 급증했다.
문제는 달러 잔액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쌓이는 동안에도, 이날 원·달러 환율이 장중 1,549원까지 치솟으며 1,550원 선을 위협했다는 점이다. 환율은 지난 16일부터 연일 상승세를 타며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에 머물고 있다.
기업은 사고, 개인은 팔았다…엇갈린 행태
이번 외화예금 증가는 사실상 기업이 주도했다. 기업 달러화 예금(829억9,000만 달러)은 한 달 새 29억4,000만 달러 늘어난 반면, 개인 달러화 예금(125억7,000만 달러)은 오히려 7억 달러 감소했다.
개인 투자자들은 환율 급등 국면에서 환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달러를 시장에 내놓는 모습이다. 반면 대기업은 해외 사업으로 벌어들인 달러를 국내 은행 외화예금에 그대로 예치하면서, 개인이 판 달러를 기업이 사실상 흡수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환전 지연’이 환율 안정 막는 구조적 원인
통상적으로 수출 기업이 달러 수출대금을 원화로 환전하면 외환시장에 달러 공급이 늘어나 원화 약세 압력이 완화된다. 그러나 현재는 이 채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우리은행 박형중 연구원은 “대미 투자 확대와 환율 상승 기대가 맞물리면서 기업들의 달러 보유 성향이 커졌다”며 “특히 수출 규모가 크고 미국 투자가 진행 중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에서 이런 흐름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미국 공장 증설 등 현지 투자를 위해 달러 지출이 불가피한 기업들로서는, 수출대금을 달러로 쌓아두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향후 환율이 더 오를 경우 추가 환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기업들의 환전 지연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이 구조가 ‘수출 호황 → 기업 달러 예금 증가 → 시장 달러 공급 축소 → 환율 추가 상승’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 ‘조기 환전’ 독려…정책과 기업 이해 충돌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환율 안정 조치로 기업들을 상대로 수출대금 조기 환전을 독려하고 나섰다. 기업들이 달러를 예금 형태로 묶어두면 실질적으로 시장에 공급되는 달러가 줄어 당국의 환율 방어 여력도 약화된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외국인의 대규모 ‘셀코리아’가 이어지며 원화 약세 압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달러 사수 전략이 쉽게 바뀔지는 미지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