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든 역대급 성과급이 전 산업 임금을 끌어올리고, 그 여파가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임금발(發)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정작 호황의 온기를 체감하지 못한 저소득층은 오른 물가와 다가올 금리 인상이라는 이중 부담을 홀로 짊어질 처지에 놓였다.
한국은행은 지난 1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업계 상위 10% 수준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사업체 비중이 늘어나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개월 뒤 0.05%포인트(p) 오른다고 분석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임금·수요 측면의 물가 상승 압력이 강해졌다”며 “소비자물가는 앞으로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의 오름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공개 경고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작년 10월 기준 임금근로자 2,248만 8천 명 중 월평균 임금(상여 포함·세전) 500만 원 이상인 근로자는 371만 3천 명으로 전체의 16.5%를 차지했다. 규모와 비중 모두 2013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다.
특정 업종 집중 성과급, 시차 두고 물가 자극
한국은행은 전 산업에 걸쳐 특별급여가 평균적으로 10% 오를 경우 물가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특정 업종에 집중될 경우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유의한 영향을 미친다고 명시했다. 반도체 호황을 등에 업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식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이 전 산업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 핵심 변수로 꼽힌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영업이익에 연동하는 성과급을 지급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없는데 한국 업계에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이 돈이 소비나 부동산 같은 자산에 쓰이면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물가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은행·연준이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올리면 그 자체가 다시 임금 인상 요구의 근거가 되는 악순환이 생긴다”며 “임금 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업 물가가 본격적으로 오르면 헤드라인뿐 아니라 근원물가까지 동반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업종 간 임금 격차, 혜택은 위로만
작년 10월 기준 월 500만 원 이상 임금근로자 비중은 제조업에서 24.0%였지만, 보건·사회복지업은 5.4%, 숙박·음식점업은 1.4%에 그쳤다. 반도체 중심 제조업과 서비스·내수 업종 사이의 구조적 임금 격차가 이번 성과급 호황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올해 한국 명목 GDP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넘어설 전망이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에 머물고 있다며 “거시지표는 뜨겁지만, 자영업자의 체감경기는 여전히 차갑다”고 지적했다. 신 총재도 중동 전쟁 이후 국제유가 급등으로 석유류 가격이 20% 넘게 상승하면서 저소득층 생계비 부담이 커졌다고 짚었다.
‘핀셋 재정’으로 삼중고 완충해야
전문가들은 물가를 자극하지 않는 방식의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 실장은 “재난지원금처럼 전반적으로 재정을 푸는 방식은 물가를 오히려 자극할 수 있다”며 “에너지·식료품 바우처처럼 오로지 해당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저소득층에 지급해야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대안으로는 임금 상승률은 유지하면서도 물가상승률을 2% 이하로 관리하는 일본의 사례가 거론된다. 김 실장은 “석유 최고 가격제처럼 물가 상승을 자극하지 않고 부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재정이 투입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