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LNG 공급의 20%가 사실상 차단된 상황에서도 천연가스 가격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고 있다. 대신증권은 그 배후에 ‘슈퍼 엘니뇨’가 있다고 분석했다.
대신증권 최진영 연구원은 5일 보고서를 통해 “슈퍼 엘니뇨로 인해 천연가스 가격 상승 시기가 지연됐다”며 “본격적인 상승은 내년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복합 악재가 겹쳤음에도 가격 급등이 억제된 원인을 기상이변에서 찾은 것이다.
호르무즈 봉쇄, LNG는 우회로가 없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원유보다 LNG 시장에 더 치명적이다. 최 연구원은 “원유와 달리 LNG는 우회로가 부재해 전 세계 LNG 수출의 20%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고 밝혔다. 페르시아만 안쪽에서 출항하는 LNG 선박은 호르무즈를 통과하지 않으면 대양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금융투자도 이 여파를 수치로 제시했다. 해당 리포트에 따르면 봉쇄 여파로 아시아 기준 LNG 현물 가격인 JKM(일·한·중 지표)이 올 3월 30달러/MMBtu까지 급등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5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던 전례에 비하면 낮지만, 역사적으로는 여전히 ‘위기 가격대’에 속하는 수준이다.
엘니뇨가 만든 역설…공급 부족인데 가격은 제자리
문제는 공급 차질에도 불구하고 가격 상승의 기폭제인 ‘겨울 난방 수요’가 약화됐다는 점이다. NOAA(미국 해양대기청)에 따르면 현재 동태평양 연안 해수면 온도는 평년보다 1도 높아 엘니뇨 조건을 충족한 상태다.
엘니뇨 시기에는 강화된 아열대 제트기류가 극 제트기류의 남하를 막아 북반구 겨울 기온을 평년보다 높게 만든다. 겨울 평균기온이 1~2℃만 높아져도 난방도일(HDD)이 줄고 가스 난방 수요는 수 % 단위로 감소하는 패턴이 반복돼 왔다. 최 연구원은 “엘니뇨 시기에는 여름철 냉방보다 중요한 겨울철 난방 수요가 약해진다”고 설명했다.
2027~2028년, 공급은 줄고 수요는 폭증
시장에서는 엘니뇨가 진정되는 시점부터 수급 긴장이 본격화될 것으로 본다. 최 연구원은 “늦어도 내년 1월부터 슈퍼 엘니뇨 상태가 진정될 것으로 예보돼 가격 할인 요인이 사라지게 된다”며 “반면 가격 상승을 위한 수급 조건은 이미 충족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수요 측면에서는 AI 인프라 확장이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대신증권은 “전력향 수요는 AI 인프라 확장으로 폭증하고 있지만 2027~2028년 신규 공급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IEA 등 국제 에너지 기관들도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중·후반 2020년대에 두 배 수준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여기에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워터 코닝(Water Coning)’ 현상도 변수다. 워터 코닝은 가스전 생산 과정에서 지하 물층이 생산정(井)으로 침범해 생산성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훼손되는 현상으로, 사태가 종료된 이후에도 중동 생산기반이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되기 어렵다는 논리에 쓰인다. 최 연구원은 “엘니뇨 후퇴와 워터 코닝을 고려하면 수급은 한층 더 타이트해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다만 하나금융투자는 카타르·미국 등의 대규모 LNG 증설 물량이 가세할 경우 중장기적으로 공급 과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보다 신중한 시각을 드러낸다. 에너지 업계 전문가들은 “탄소중립 기조 속 투자 위축과 지정학 리스크가 맞물려 실제 가용 공급 능력이 명목 설비만큼 늘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