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경쟁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 열도로 향하고 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일본 현지에서 엔비디아와 손잡은 ‘AI 팩토리’의 일본 가동 계획을 직접 공표하면서, 한·일을 잇는 AI 인프라 동맹 구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최 회장은 11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과의 인터뷰에서 SK의 메모리 반도체와 엔비디아의 GPU를 결합한 AI 팩토리를 일본에서 2028~2029년을 목표로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1호 AI 팩토리는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어, 일본은 그 첫 번째 해외 거점이 된다.
이번 발언은 지난 9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닛케이포럼 ‘한일특별세션’ 직후 나온 것으로, 최 회장이 미즈호은행·스미토모화학 등 일본 주요 기업 인사들과 함께 한일 경제연대 청사진을 제시한 직후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GW급 데이터센터, 부지 조사 착수
최 회장이 상정하는 일본 AI 팩토리의 규모는 상당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도시 소비 전력에 해당하는 기가와트(GW)급 데이터센터”를 목표로, 넓은 토지와 안정적인 대규모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후보지를 현재 조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에 따르면 향후 2~3년 내 가동을 목표로 일본 현지 기업들과 구체적인 협의가 진행 중이다. 다만 총 투자액과 구체적 건설 지역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용인 클러스터 ‘2045년’에서 속도전으로 전환
최 회장은 해외 확장과 함께 국내 투자 가속 의지도 분명히 했다. 그는 당초 2045년까지 반도체 공장 4기 완공을 목표로 한 용인 클러스터와 관련해 “완성을 수년 이상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판매 이익의 투자 방향에 대해서도 그는 “현재는 반도체 수요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을 반도체 공장 건설에 투입하고 있다”며 공장의 ‘AI화’와 엔지니어 채용 확대도 병행하겠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용인 클러스터 완공 일정이 앞당겨질 경우, 국내 장비·소재·건설·전력 인프라 관련 기업들의 수주 시점도 조기화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대규모 설비투자(CAPEX) 확대에 따른 재무 부담과 메모리 업황 변동성은 투자자들이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리스크 요인으로 꼽힌다.
키옥시아·라피더스…경제안보를 씨실로 짠 한·일 반도체 동맹
최 회장이 그리는 그림은 AI 팩토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SK가 핵심 주주이자 전략적 파트너인 일본 낸드플래시 기업 키옥시아에 대해 “인재·연구개발·반도체 생태계 측면에서 다양한 협력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경쟁 관계이면서도 협력을 모색하는 이른바 ‘프레너미(Frienemy)’ 구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차세대 로직 반도체 육성을 위해 설립을 지원하는 라피더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언제든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도쿄일렉트론 등 일본 소재·장비 기업과는 이미 상시 연대 중이라는 점도 확인했다.
최 회장은 이러한 협력의 의미를 경제안보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한일 반도체 생태계를 연결하는 것은 단순한 기업 제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의 경제안보에 있어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본 내 반도체 공장 신설과 관련해서는 온도 차가 존재한다. 최 회장은 “일본은 전력·재료 등 필요한 생태계가 모두 갖춰진 훌륭한 후보지”라고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SK그룹 측은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발언으로 현재 일본 반도체 공장 건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고 즉각 선을 그었다. AI 팩토리는 일본행이 확정된 반면, 반도체 팹은 ‘가능성 언급’ 수준에서 관리되는 이중 구조가 현재 SK의 공식 스탠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