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파운드리 세계 1위 TSMC가 미국 애리조나 공장 인근에 기존 부지와 동일한 규모의 토지를 추가로 매입했다고 밝혔다. 지금 당장 공장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10년 이후의 수요까지 내다본 ‘선제적 토지 확보’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은 4일(현지시간) 대만 신주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며, “앞으로 10년간의 산업 확장 수요는 충분히 지원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공장 부지와 생산 시설이 여전히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AI 수요가 ‘사막 한가운데 땅 전쟁’ 촉발
TSMC가 미국에 쏟아붓는 자금은 이미 천문학적 수준이다. 미국 내 웨이퍼 제조공장 3곳, 첨단 패키지 공장 2곳, R&D 센터 1곳을 포함한 총 투자 규모는 현재까지 1,650억 달러(약 238조 원)에 달하며, 향후 계획까지 반영하면 최대 2,500억 달러(약 362조 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
이 같은 공격적 투자의 배경에는 AI 수요의 ‘예상 밖 가속’이 있다. 웨이 회장은 “시장 발전 속도가 업계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고 진단했다. TSMC는 2030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를 1조 5,000억 달러(약 2,170조 원)로 전망하는데, 이 중 AI 관련 반도체가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미 TSMC 전체 생산액에서 7나노 이하 첨단 공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74%에 달한다.

애리조나 공장은 단순 범용 로직 생산 기지가 아니다. 첫 번째 공장(Fab 1)은 이미 가동에 들어갔고, 두 번째 공장(Fab 2)은 2026년 하반기 장비 설치가 예정돼 있다. AMD는 컴퓨텍스에서 TSMC 2나노 공정 기반의 차세대 AI 서버 칩 양산 계획을 발표하며 애리조나 팹 활용을 예고한 바 있다.
웨이 회장이 직접 꺼낸 ‘3대 난제’
웨이 회장은 건설 진척이 순조롭다면서도, 현지 공장이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공개적으로 나열했다. 대기오염 배출 통제, 전력·용수 부족, 숙련 건설 인력 부족이다. 특히 인력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그가 꼽은 공급망 병목은 전력·칩·소재·첨단 패키징 전방위에 걸쳐 있다. 업계에서는 AI 칩의 핵심 공정인 CoWoS 등 2.5D·3D 첨단 패키징 분야가 가장 심각한 병목으로 꼽힌다. 웨이 회장이 “이는 TSMC 한 회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한 것은, 정부·전력사·소재·장비·고객사 모두가 인프라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고비용 구조도 변수다. 업계에서는 애리조나 공장의 인건비·운영비가 대만 대비 현저히 높아 웨이퍼 가격 인상의 주요 배경이 됐다고 분석한다. 미국 정부 보조금과 장기 공급 계약이 일부 상쇄 요인이 될 수 있지만, 수익성 부담은 여전하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메모리는 한국, 로직은 우리’…역할 분담론 선 그어
웨이 회장은 엔비디아 젠슨 황 CEO의 한국 방문 이유를 “메모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은 세계 최대 메모리 생산국이고, 로직 칩은 TSMC가 최대 제조사라는 역할 구분을 명확히 한 것이다. 한국이 대만식 반도체 공급망 모델을 복제하려 한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TSMC가 대만에 있기 때문에 대만 반도체 산업이 영원히 선두를 유지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업계에서는 이 발언이 메모리와 로직의 분업을 강조함으로써 정면 충돌보다는 역할 차별화를 내세운 것으로 분석한다. 다만 TSMC가 애리조나에 첨단 로직·패키징 거점을 굳히면, 한국 메모리 업체들도 미국 내 후공정·패키징 투자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웨이 회장은 이날 이사회 이사 수를 기존 10명에서 12명으로 늘리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미국·일본·독일 등 복수 국가에서 팹을 동시에 운영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제조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이사회 구성 다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