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국 영토 안에서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던 망명자들의 신변이 사실상 적국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국 법원이 2026년 5월 8일, 홍콩 민주진영 인사들을 감시한 혐의로 중국 스파이 2명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서방 정보당국 전체가 경악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미행이나 사진 촬영이 아니었다. 피고인 중 한 명이 영국 이민국 소속 현직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정보 활동이 물리적 감시를 완전히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댄 자비스 영국 내무부 안보 담당 부장관은 즉각 중국 대사를 소환하며 “이들이 중국을 위해 벌인 활동은 우리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측은 “사법 절차를 조작한 정치적 행위”라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법정 판결이 확정된 이상 양국 관계는 극도로 경색될 전망이다.
행정 시스템 내부까지 파고든 포섭 공작
이번 사건에서 중국 당국이 탈취한 정보의 목록은 충격적이다. 출입국 기록, 개인 주소지, 가족 관계도, 정치적 인맥 동선 등 영국 정부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민감 정보가 고스란히 중국 측 정보망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민국 공무원이라는 직책 자체가 해당 정보에 대한 합법적 접근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이버 보안 시스템으로는 원천적으로 탐지가 불가능했다.
기존 스파이 활동이 외국인 요원을 현지에 파견해 물리적으로 감시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수법은 현지 공무원을 내부자로 포섭해 공식 직무를 가장한 채 시스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적발 난이도가 극도로 높을 뿐 아니라, 단 한 명의 내부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피해 규모가 기존 수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점이 핵심 위협이다.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중국 간첩망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르웨이에서도 2026년 5월 7일, 중국인 여성 1명이 우주공항 인근에서 민감한 위성 데이터 수집용 수신기를 설치하려 한 혐의로 체포됐다. 영국 판결과 하루 차이로 터진 노르웨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서 중국의 정보 활동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매우 정교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흐름을 관통하는 공통 키워드는 ‘초국가적 탄압(Transnational Repression)’이다. 권위주의 체제가 국경을 무시하고 자국 밖의 반대 세력을 추적·억압하는 이 수법은 이제 민주주의 국가들이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안보 위협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대공수사 공백 속 동일 위협 앞에 서다
이 사건이 한국에 던지는 함의는 단순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약 5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 유학생과 체류자, 3만3,000여 명의 탈북민, 홍콩·대만 관련 활동가들이 공존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다. 중국의 정보망이 영국 이민국 공무원을 포섭할 정도로 정교해진 상황에서, 한국의 출입국 기관과 핵심 산업기술 분야 역시 동일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의 내부 방첩 역량이다. 2024년 1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된 이후 간첩 적발 건수가 급격히 감소했고, 국민 68%가 “한국에 간첩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과 달리 실제 검거 실적은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이버 보안망 구축과 더불어, 합법을 가장해 시스템 내부에 침투하는 휴민트(HUMINT) 위협을 차단하는 복합 방첩 체계의 재정비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