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 깃발도 없는데 응원하러 간다”…8년 만의 방남, ‘인공기·한반도기’ 모두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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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CL 준결승을 앞둔 양팀 대치
AWCL 준결승을 앞둔 양팀 대치 / 연합뉴스

스포츠가 정치를 넘을 수 있을까. 2026년 5월 20일 오후 7시, 수원종합운동장 그라운드 위에서 그 오래된 질문의 답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른다.

북한 평양 연고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2025-2026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준결승을 위해 수원FC 위민과 격돌한다.

북한 체육인의 방남은 2018년 이후 8년 만이며, 북한 여자축구팀만 따지면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12년 만이다. 특히 클럽팀 차원의 방남은 역대 최초 사례로, 이번 경기는 단순한 4강전을 넘어 한반도 안보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된 정치적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입국부터 이례적… 39명 선수단의 4박 5일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오는 17일 베이징을 경유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한다. 리유일 감독이 이끄는 선수단 규모는 선수 27명, 스탭 12명을 포함한 총 39명이다.

남북 선수단은 같은 숙소 건물을 사용하지만, 식사와 이동 동선은 철저히 분리된다. 실질적인 교류는 20일 오후 7시, 경기 시작 휘슬과 함께 90분간만 허용되는 셈이다. 선수단은 경기 다음날인 21일 복귀 예정으로, 4박 5일간의 방남 일정이 마무리된다.

내고향여자축구단은 국제 연령별 대회 우승 경험을 보유한 선수들로 구성된 강팀으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준결승에서 한국을 2-1로 꺾고 결승에서 일본마저 제압하며 금메달을 따낸 저력이 있다. 이번 준결승 역시 만만찮은 전력 대결이 예상된다.

내고향 선수단의 재방한 준비
내고향 선수단의 재방한 준비 / 연합뉴스

흔들 깃발이 없다… 국가보안법과 AFC 규정의 이중 함정

경기를 앞두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대규모 응원단을 모집했다. 일부 단체의 응원단 100명이 한 시간 만에 마감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응원전은 시작 전부터 법적 암초에 부딪혔다. 북한 국기인 인공기를 경기장에서 게양하거나 전시할 경우 현행 국가보안법 위반 소지가 있어 치안 당국의 엄격한 통제가 불가피하다. 대안으로 거론된 한반도기도 마찬가지다. AFC는 경기장 내 일체의 정치적·종교적 표현물을 금지하고 있으며, 한반도기 역시 정치적 표현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특례 승인으로 한반도기 사용이 가능했지만, 이번엔 그런 예외 조항이 적용될 여지가 없다.

AFC 역시 5월 7일 대한축구협회에 공식 입장을 전달하며 이번 대회가 정치적 이슈와 분리된 순수 스포츠 행사로 치러져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응원하고 싶어도 꺼낼 깃발이 없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방남 직전 내고향 선수단의 환호
방남 직전 내고향 선수단의 환호 / 뉴스1

평창의 낭만은 끝났다… 한국 정부, “단순 국제대회” 선 긋다

이번 방남의 이면에는 더 냉혹한 현실이 자리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3년 말 헌법 개정을 통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전쟁 중인 두 교전국’으로 공식 규정했다.

그러면서도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의 고립을 피하고 체제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 이번 방남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사실상 실리 외교와 체제 선전이 복합된 포석이다. 한국 정부의 대응도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 남북 스포츠 행사를 평화의 상징으로 포장하던 기조는 사라졌다.

8년 만에 돌아온 내고향
8년 만에 돌아온 내고향 / 뉴스1

통일부는 이번 경기를 “남북 스포츠 교류가 아닌 단순한 국제대회의 일환”으로 못 박으며, 북한 선수단을 여타 외국 팀과 동일하게 취급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화해를 외치는 시민사회와 냉정하게 선을 긋는 정부, 체제 선전을 노리는 북한이 수원 그라운드에서 묘하게 충돌하는 구도다.

90분의 경기가 끝난 뒤 어느 쪽이 정치적 승자가 될지는 스코어보드만큼이나 불투명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경기가 스포츠 경기인 동시에 한반도 안보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는 사실이다. 향후 남북 스포츠 교류의 방향성은 이 90분이 어떻게 소화되느냐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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