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제국 ‘델몬트’의 추락
135년 역사도 막지 못한 위기

달콤한 복숭아 통조림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던 델몬트 푸즈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135년 전통을 자랑하던 이 식품 기업의 몰락은 단순한 경영 실패를 넘어, 전통 식품산업이 처한 구조적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1일(현지시간), 델몬트 푸즈가 미국 뉴저지 파산법원에 챕터11에 따른 파산보호 절차를 신청했다고 보도했다.
회사 측은 주요 채권자들과 합의 끝에 이 같은 결정을 내렸으며, 약 9억 1천250만 달러(한화 약 1조 2천400억 원)의 운영 자금을 확보해 절차 진행 중에도 사업은 계속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무너진 ‘통조림 왕국’, 어디서부터 꼬였나

델몬트 푸즈는 과거 과일·채소 통조림뿐 아니라 칼리지 인 육수, 조이바 차 브랜드 등 다양한 식품 포트폴리오로 미국 가정의 식탁을 지켜왔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시장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점이 결정적 패착이 됐다.
팬데믹 당시 수요가 급증하자 생산량을 대폭 늘렸고, 이는 결과적으로 과잉 재고로 이어졌다. 팬데믹 종료 후 수요가 급감하면서 대량의 재고가 창고에 쌓였고, 할인 판매에 의존하게 되며 수익성은 크게 악화됐다.
여기에 소비 트렌드 변화도 직격탄이 됐다. 최근 몇 년간 소비자들은 가공식품 대신 신선식, 건강식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델몬트의 주력인 통조림 식품은 그 흐름에 역행했다.

경제적인 여건도 녹록지 않았다. 2024년 기준, 델몬트 푸즈는 약 12억 4천500만 달러(약 1조 7천억 원)의 부채를 떠안고 있었으며, 연간 이자만 1억 2천500만 달러에 달했다.
영업이익보다 이자가 더 많으니 회사가 지속될 수 없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운영비용 상승도 큰 부담이었다. 캔을 만드는 철강, 알루미늄 가격은 급등했고, 인플레이션과 물류비 상승까지 겹쳐 수익성은 바닥을 쳤다.
이 와중에 내부 구조조정과 채권자 간 갈등, 이사회 교체 등도 겹치며 조직 내 혼란은 극에 달했다.
글로벌 식품업계에도 드리운 그늘

델몬트 푸즈의 파산은 단지 한 기업의 추락이 아니라, 글로벌 식품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통조림 식품의 수요는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서 매년 줄어들고 있다. ‘가공식품보다 신선식품이 낫다’는 인식은 이제 주류가 되었고, 고비용 구조에 비해 수익이 낮은 통조림 산업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또 다른 변수는 소비자의 선택 변화다. 경기 침체 속에서 많은 소비자들이 델몬트 같은 전통 브랜드 대신 대형마트의 자체 브랜드(PB)나 저가 브랜드를 선호하게 됐으며, 이는 기존 시장의 점유율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한편, 델몬트는 이번 파산이 미국 내 법인에 국한된 것이며 필리핀, 싱가포르, 한국 등 해외 자회사에는 영향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본사의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이 장기적으로 글로벌 전략에 변화를 줄 가능성은 있다.
업계 구조 재편 신호… 경쟁사엔 기회 될 수도

델몬트가 보유한 브랜드와 생산시설 매각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경쟁사 입장에서는 인수나 점유율 확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식품업계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기존 상품 포트폴리오의 한계를 직시하고, 건강·신선·친환경 등의 트렌드에 더 빠르게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그레그 롱스트리트 최고경영자(CEO)는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한 끝에, 법원의 감독 아래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회생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회사는 ‘더 강하고 지속 가능한 델몬트’를 만들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소비자의 외면과 시장의 변화 속에서 얼마나 빠르게 체질을 개선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델몬트의 사례는 전통 기업도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위기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