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하이닉스가 단순 부품 공급사 역할을 넘어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플랫폼 설계 단계에 직접 참여하는 장기 기술 파트너십을 공식화했다. 양사는 AI 팩토리용 차세대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고, 반도체 설계 자동화(EDA)·디지털 트윈 분야에서도 협력 범위를 대폭 넓힌다.
SK하이닉스는 8일 “지난 수년간 세계 최고 수준의 AI 컴퓨팅 플랫폼 구축을 위해 긴밀히 진행해 온 협업을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고도화하는 데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번 동맹을 두고 HBM(고대역폭 메모리) 공급 계약이 아닌, 엔비디아 인프라 로드맵에 ‘사전 설계 단계부터’ 진입하는 구조적 격상으로 평가한다.
4개 차세대 플랫폼, 메모리부터 함께 짠다
이번 파트너십의 핵심은 엔비디아가 추진하는 4개 차세대 플랫폼에 SK하이닉스 메모리를 공동 설계 단계부터 탑재하는 것이다. 양사가 공동 개발에 합의한 대상은 ▲베라 루빈(Vera Rubin) AI 슈퍼컴퓨터 ▲베라 CPU ▲RTX 스파크 PC ▲젯슨 토르(Jetson Thor) 로보틱 컴퓨팅 플랫폼용 메모리다.

젯슨 토르는 엔비디아가 GTC 2024에서 공개한 로보틱·엣지 AI용 SoC(단일칩시스템)로, 최대 800 TFLOPS급 AI 연산 성능을 제공하며 휴머노이드 로봇과 산업용 자율기계에 최적화된 플랫폼이다. SK하이닉스가 이 플랫폼의 메모리를 초기 설계 단계부터 공동 기획하게 된다는 점에서, 업계는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생태계 내 ‘디폴트 메모리 파트너’로 자리를 굳히는 구조라고 분석한다.
이번 협력은 AI 인프라(데이터센터)·퍼스널 AI(온디바이스 AI)·피지컬 AI(로봇·자율기계) 등 엔비디아가 개척하는 3대 신시장 전반을 포괄한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점유율은 2023년 기준 53~60% 수준으로 세계 1위이며, H100·H200 등 엔비디아 주요 AI GPU의 핵심 메모리 공급사로 이미 자리잡은 상태다.
팹 안으로 들어온 엔비디아… EDA·디지털 트윈 3각 동맹
메모리 공급을 넘어 반도체 설계·제조 공정 자체에도 엔비디아 기술이 깊숙이 이식된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GPU 연산 플랫폼 CUDA-X를 활용해 반도체 설계·제조 시뮬레이션의 처리 속도와 효율을 높이고 있으며,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협력 범위를 EDA(반도체 설계 자동화) 전반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양사는 반도체 제조사·엔비디아·EDA 소프트웨어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3각 협력 체계’ 구축도 추진한다. 시놉시스·케이던스 등 EDA 대형 소프트웨어사들이 이미 엔비디아와 GPU 가속 EDA를 공동 마케팅 중인 만큼, SK하이닉스 팹이 이 구도의 핵심 제조 레퍼런스로 기능하게 된다.
자율 제조 기반을 다지는 디지털 트윈 협력도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3D 협업·시뮬레이션 플랫폼 옴니버스(Omniverse)를 활용해 실제 반도체 공장을 3차원 가상 공간에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AI가 팹 운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자동화해 생산성과 운영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협력을 확장할 예정이다.

“병목을 선제 해소” vs “고객 의존 심화”… 엇갈리는 시선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파트너십이 양사 모두에게 전략적 필요에서 비롯된 결합이라고 평가한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AI 팩토리 사업의 최대 병목이었던 HBM 수급 문제를 차세대 플랫폼 설계 단계부터 공동 기획함으로써 선제 해소할 수 있게 됐다. SK하이닉스 역시 2024~2028년 HBM 생산 능력을 매년 약 2배 수준으로 확대하는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인 만큼, 엔비디아라는 장기 수요처를 조기에 확보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다만 일부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엔비디아 의존도 심화를 잠재 리스크로 지목한다. SK하이닉스 매출에서 엔비디아향 HBM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특정 고객에 대한 집중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엔비디아 역시 단일 메모리 공급사에 대한 기술적 의존이 깊어질수록 가격·공급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AI 팩토리는 차세대 산업혁명의 엔진이고 첨단 메모리는 그 성능의 핵심”이라며 SK하이닉스를 “AI 컴퓨팅 플랫폼을 위한 첨단 메모리 기술 제공의 핵심 파트너”로 규정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AI 팩토리용 차세대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고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 AI를 적용함으로써 AI 인프라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