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이 원유 수송로 봉쇄라는 익숙한 카드 뒤에, 훨씬 더 정밀하고 치명적인 무기를 숨겨두고 있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연계된 반관영 매체 타스님뉴스가 2026년 4월 22일 호르무즈 해협 해저를 지나는 국제 인터넷 케이블의 상세 경로와 상륙 지점, 인근 데이터센터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하며 중동 디지털 인프라의 ‘목줄’을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섰다.
직접적인 파괴 위협 문구는 없었다. 그러나 군부와 직결된 매체가 ‘바다 밑 지도를 꺼낸 것 자체’가 사보타주 가능성을 시사하는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미국과 동맹국에게는 “원유만이 협상 카드가 아니다”는 신호를, 걸프 국가들에게는 직접적 경고를 동시에 날린 셈이다.
호르무즈 해저에 깔린 디지털 생명선
호르무즈 해협과 인근 해역에는 FALCON, AAE-1, TGN-Gulf, SEA-ME-WE 계열 등 아시아-중동-유럽을 잇는 대형 국제 회선을 포함해 최소 7개 이상의 해저 통신 케이블이 지나간다. 이 케이블들은 해협을 통과한 뒤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 푸자이라에서 상륙해 지역 데이터센터와 국가 백본망으로 연결된다.

의존도 수치가 이 위협의 무게를 설명한다. 걸프 지역 전체 인터넷 트래픽의 30~37%가 호르무즈 인근 케이블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UAE·카타르 등 페르시아만 남쪽 연안국은 최대 90%까지 이 케이블에 기댄다. 이란 자신도 30~40%를 의존하고 있어, 이중적 위험 구조 속에서 이란이 이 카드를 꺼낸 것이다.
원유보다 무서운 이유, 대체 수단이 없다
전문가들이 해저 케이블 위협을 원유 봉쇄보다 더 심각하게 보는 핵심 이유는 단 하나다. 손상 시 대체 수단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원유와 가스는 수송 항로를 우회하거나 비축분, 대체 공급선으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지만, 대용량 인터넷 트래픽은 위성 통신으로 대체하기에 물리적 한계가 크다.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95% 이상, 하루 10조 달러 이상이 오가는 국제 금융 거래 상당수도 해저 케이블에 의존한다. 홍해 SMW4·IMEWE 케이블 손상으로 인도·파키스탄·중동 일대 인터넷 속도가 대폭 저하됐던 사례, 발트해 해저 케이블이 연이어 손상되며 러시아 사보타주 의혹이 제기됐던 사례는 전면전 없이도 상대 경제와 통신망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음을 이미 입증했다.
!["원유 봉쇄보다 더 무서운 이유"… 대체 수단 없는 해저 케이블, 이란의 '진짜 무기' 3 그래픽] 호르무즈 해협 통과 유조선 국내 입항 예정 - 뉴스1](https://www.reportera.co.kr/wp-content/uploads/2026/04/news1_ED98B8EBA5B4EBACB4ECA688_ED95B4ED9891_20260425_023351.jpg)
닻 한 번에 ‘인터넷 블랙아웃’…회색지대 공격의 교과서
해저 케이블을 노린 공격의 가장 큰 특징은 고의성 입증이 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선박이 닻을 바닥에 내린 채 이동하며 케이블을 절단하는 방식이 대표적 수법으로,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케이블 손상 배후로 지목된 사건과 발트해에서 러시아 선박의 의심스러운 작업 흔적이 포착된 사건 모두 이 패턴을 따랐다.
호르무즈 해협처럼 항로가 좁고 복잡한 해역에서는 의도적·비의도적 사고를 위장하기가 더 쉽다. 이란이 군함 대신 상선·어선·특수선박을 동원할 경우 책임 소재를 둘러싼 외교적 분쟁은 한없이 복잡해질 수 있다. 해저 통신사들이 이란 영해를 피해 오만 측 해역으로 경로를 설계해 왔지만, 준전시 상황에서는 오만 영해 통과가 완전한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경고가 잇따르는 이유다.
호르무즈에서 시작된 이란의 ‘케이블 카드’는 중동을 넘어, 전 세계가 해저 디지털 인프라를 군사·외교 전략의 핵심 축으로 다뤄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신호탄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도 중국·러시아의 해저 케이블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는 만큼, 해저 인프라를 새로운 안보 영역으로 제도화하는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