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던 폐식용유, 항공기 연료로
탄소 감축·수출까지…K-연료 기술 주목

“이걸로 비행기를 띄운다고?”
진한 기름 냄새 속에서 투명한 연료가 뚝뚝 떨어졌다. 폐식용유가 항공기 연료로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이제는 주방에서 무심코 버리던 폐식용유가 세계 항공산업의 판을 흔들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자체 기술력으로 이뤄낸 혁신은 단순한 연료 개발을 넘어, 108조 원 규모의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폐기물에서 미래 자원으로

폐식용유는 오염되기 쉽고 품질도 낮아 산업적 활용도가 떨어지는 원료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은 이 흔하디흔한 ‘음식물 찌꺼기’를 고온·고압 기술로 정제해, 국제 기준을 충족하는 지속가능 항공유(SAF)로 탈바꿈시켰다.
지난해 9월,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에너지는 울산CLX에 SAF를 연간 10만 톤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본격적인 상업 생산에 돌입했다. 이는 국내 정유사 최초의 시도다.
이 공정의 핵심은 ‘코프로세싱(Co-Processing)’ 기술이다.
기존 석유 정제 설비에 바이오 원료 공급 라인을 연결해, 원유와 바이오 연료를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덕분에 정유소는 끊김 없는 생산이 가능해졌다.
정호승 SK이노베이션 지속가능연료기술팀장은 “기존 항공유 대비 탄소 배출량을 최대 80%까지 줄일 수 있다”며 “SAF 시장은 연평균 46% 성장해 2034년에는 108조 원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아시아에 뻗친 K-연료

기술력에 기반한 SK의 SAF는 이미 세계 무대에 진출했다.
SK에너지는 올해 1월, 국내 정유사 최초로 SAF를 유럽에 수출한 데 이어, 3월에는 아시아 최대 민항사인 홍콩 캐세이퍼시픽항공과 대규모 공급 계약을 맺었다.
홍콩 첵랍콕국제공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이용객이 많은 환승 허브로, SK는 이 거점을 기반으로 SAF 공급망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국내 항공사들과도 연계해 에어부산과 대한항공에 SAF를 납품 중이며, 원료 확보부터 생산, 판매에 이르기까지 SAF 밸류체인을 완성하며 글로벌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GS칼텍스 등 국내 주요 정유사들도 SAF 생산과 공급 확대를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며 시장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지속 가능한 하늘길, 남은 과제는

전 세계적으로 SAF 사용은 의무화 흐름을 타고 있다. 유럽연합은 올해부터 항공유에 SAF를 2% 이상 혼합하도록 규정했고, 2050년까지 이 비율을 70%로 높일 계획이다.
미국은 SAF 생산 기업에 갤런당 최대 1.75달러의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있으며, 일본도 설비 투자에 대해 최대 40%의 세제 혜택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정책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통상자원부와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8월, 2027년부터 국제선 항공기에 SAF 혼합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투자 지원이나 세제 혜택은 미비한 수준이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SAF 전용 생산시설 구축에는 최소 수조 원 단위의 투자가 필요하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SAF의 주요 원료인 폐식용유의 안정적인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국내에서는 수거와 검증 체계가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목질계 바이오 원료의 경우는 공급이 불안정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항공사들은 SAF 도입 여부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이유는 명확한데, SAF는 기존 항공유보다 최대 여덟 배 비싸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이 SAF를 시험적으로 도입했을 당시에도 운영비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을 비롯한 국내 정유사들은 기술 개발과 생산 효율화로 이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폐식용유 같은 저품질 원료를 활용하면서도 국제 기준을 만족시키는 연료 생산에 성공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 SAF는 실험 단계를 넘어, 실제 항공기 운항에 사용되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국내 업계의 기술력과 대응 속도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도 달라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