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가 미국 프리미엄 SUV 시장에서 ‘물량전’을 선언했다. 2030년 미국 연간 판매 40만 대를 목표로 향후 2~3년 안에 북미 시장에 신차 30개를 투입하고, 2027년부터는 핵심 볼륨 모델인 GLC를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직접 생산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전략 변화의 파장은 독일 브레멘 공장을 넘어 한국 울산까지 미친다. 미국에서 팔리는 제네시스 GV70·GV80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울산공장에서 만들어져 태평양을 건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벤츠, ‘고수익 소량’ 버리고 ‘볼륨 확대’로 전환
벤츠의 전략 수정은 단순한 신차 출시가 아니다. 2023년 벤츠의 미국 판매량은 약 28만 2,000대 수준으로, 이 중 SUV 비중이 60~70%에 달한다. 2030년 40만 대까지 끌어올리려면 S클래스·AMG 같은 고가 모델만으로는 역부족이다. GLC, GLE, C클래스처럼 저변이 넓은 볼륨 모델을 더 촘촘하게 깔아야 한다는 계산이다.
핵심은 GLC의 현지 생산 전환이다. 현재 미국에 들어오는 GLC는 독일 브레멘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유럽산 승용차에는 미국 수입 관세 2.5%와 대서양 횡단 해상 운송비가 붙는다. 2027년 앨라배마 투스컬루사 공장에서 GLC를 찍기 시작하면 이 비용 구조가 한 단계 유리해진다. 투스컬루사 공장은 이미 GLE, GLS, EQE SUV, EQS SUV를 생산하는 벤츠의 북미 SUV 허브다.
GV70 vs GLC, 울산의 딜레마
미국 시장에서 GV70은 GLC와, GV80은 GLE와 정면충돌하는 구도다. 2023년 제네시스 미국 판매량은 6만 9,175대였으며, 이 중 SUV 비중이 70% 이상이다. 미국에서 팔리는 GV70·GV80 내연기관 모델의 대부분은 울산 생산 후 수출되는 구조로, 한·미 FTA(KORUS) 덕분에 관세는 0%지만 물류비와 수 주에 달하는 리드타임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제네시스는 지금까지 ‘합리적 가격의 프리미엄’을 앞세워 독일 브랜드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미국 기준 GV70 시작가는 약 4만 9,000달러(한화 약 7,300만 원), GV80은 약 5만 8,000달러(한화 약 8,700만 원)다. 여기에 10년/10만 마일 파워트레인 보증과 풍부한 기본 사양이 더해져 “동급 벤츠보다 5~10% 저렴하면서 기본기는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문제는 벤츠가 GLC 현지 생산으로 비용 구조를 낮추고 공격적인 인센티브·리스 조건을 시장에 던질 경우, 지금까지 제네시스가 누려온 ‘가격 대비 가치’ 포지션의 체감 격차가 좁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딜러 현장에서 “조금만 더 보태면 벤츠”라는 심리가 강화되는 순간, 브랜드 역사와 잔존가치에서 후발주자인 제네시스에게는 불리한 게임이 된다.
울산공장, 단기 리스크와 중장기 생존 전략
울산공장은 연간 약 150만 대 생산 능력을 갖춘 세계 최대 단일 자동차 공장 단지다. 아반떼(엘란트라)·투싼 같은 볼륨 모델과 제네시스 고마진 모델을 함께 돌리며 현대차 그룹의 핵심 수익 기지 역할을 해왔다. 만약 미국 시장에서 GV70·GV80의 판매 성장세가 꺾인다면, 울산 제네시스 라인의 가동률과 수익성에 직접적인 타격이 올 수 있다.
현대차그룹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이미 전기 GV70(Electrified GV70)은 IRA 대응 차원에서 미국 앨라배마 몽고메리 공장(HMMA)에서 조립 생산을 시작했다.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전기차 전용 신공장(HMGMA)이 본격 가동되면 제네시스 EV 라인업의 현지 생산 기반도 갖추게 된다. 울산EV공장을 통해 GV90 EV 등 고마진 플래그십 EV를 울산에서 생산·수출하고, 내연기관 볼륨 SUV는 점진적으로 현지화하는 역할 분담 시나리오가 업계에서 거론된다.
벤츠의 전략 전환은 제네시스에 즉각적인 위기 신호는 아니다. 그러나 ‘비싸게 적게 파는 벤츠’가 ‘더 많이, 더 가까이, 더 빠르게’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울산발 GV70·GV80이 상대해야 할 경쟁 상대는 GLC 한 모델이 아니라 벤츠의 생산 체계 전체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네시스가 보증·사양·디자인이라는 현재 강점을 유지하면서 얼마나 빠르게 현지 생산 기반을 넓히느냐가 향후 미국 시장의 판도를 가를 핵심 변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