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로 빠르게 기울던 미국 자동차 시장의 판도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혼다가 최대 2조 5,000억 엔(약 23조 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EV 전략의 속도를 조절하고, 하이브리드 중심으로 전면 선회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단순한 한 기업의 전략 수정이 아니다.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공들여 쌓아온 하이브리드 SUV 입지를, 하이브리드 경쟁력이 높은 일본 브랜드가 정면으로 흔들겠다는 선전포고에 가깝다.
23조 원 손실에도 베팅한 이유
혼다는 2025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순손익 전망을 기존 3,000억 엔 흑자에서 최대 6,900억 엔 적자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1957년 도쿄증시 상장 이후 첫 연간 적자라는 불명예도 감수했다.
손실의 핵심은 북미용 순수 EV 3종 개발 전면 중단이다. ‘Honda 0 SUV’, ‘Honda 0 Saloon’, 그리고 프리미엄 브랜드 아큐라의 ‘RSX’ EV까지 줄줄이 접었다. 소니와 합작으로 야심차게 추진하던 프리미엄 EV ‘아필라(Afeela)’ 개발도 중단됐다.
전동화 투자 규모도 기존 10조 엔에서 7조 엔으로 30% 줄였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를 ‘전략 실패’가 아닌 ‘수익성 없는 프로젝트를 과감히 정리하는 구조조정 비용’으로 해석한다. 혼다는 2027년 3월 결산 기준 순이익 2,600억 엔, 영업이익 5,000억 엔 흑자 회복을 목표로 제시했다.
2030년까지 차세대 하이브리드 13~15종 투입
혼다가 EV 전략의 속도를 조절하며 무게를 두는 카드는 하이브리드다. 2030년까지 차세대 하이브리드 모델 13~15종을 글로벌 시장에 순차 투입하고, 연간 하이브리드 판매량을 220만~230만 대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다.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기존 대비 연비 10% 이상 개선, 시스템 비용 30% 이상 절감이 핵심이다. 연비를 높이는 동시에 가격 경쟁력까지 잡겠다는 구조로, 하이브리드를 ‘프리미엄 옵션’이 아닌 ‘대중 선택지’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지역 전략의 최우선 순위는 북미다. 충전 인프라 부족과 높은 전기차 가격에 부담을 느끼는 미국 소비자에게, CR-V·파일럿·어코드로 쌓아온 신뢰를 토대로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확장한다. 특히 2029년경 D세그먼트 이상의 대형 하이브리드 SUV를 북미에 투입한다는 계획은, 시장에 상당한 파장을 예고한다.
현대·기아의 ‘하이브리드 차별화’, 흔들리는 이유
현대차 싼타페 하이브리드는 올해 4월 역대 4월 소매 판매 기록을 경신했고, 팰리세이드도 소매 판매가 10% 증가했다.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는 최고 329마력과 3열 패키징을 갖췄으며, 싼타페 하이브리드는 3만 6,000달러(약 5,400만 원)대의 가격 접근성이 강점이다.
문제는 혼다가 같은 방향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이다. 혼다가 연비·가격·공급량까지 맞춘 대형 하이브리드 SUV를 2029년에 쏟아내면, 팰리세이드와 텔루라이드가 공략하던 북미 패밀리 SUV 수요와 정면으로 겹친다. 지금까지 현대·기아에게 하이브리드는 차별화 카드였지만, 혼다의 참전으로 ‘기본 옵션’으로 격하될 위험이 생겼다.
물론 기회 요인도 있다. 혼다의 전략 전환은 역설적으로 하이브리드 SUV 시장 자체가 커진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현대·기아는 이미 미국 내 하이브리드 라인업에서 상당한 소비자 인지도를 확보한 선점 브랜드다. 또한 현대차가 미국 조지아·앨라배마에서 EV와 하이브리드를 동시에 강화하는 전략은, ‘EV 전략의 속도를 조절한’ 혼다와 달리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다.
결국 북미 SUV 시장의 경쟁 축이 ‘EV 대 내연기관’에서 ‘연비·가격·공간·브랜드 신뢰를 동시에 갖춘 하이브리드 SUV들 간의 정면승부’로 바뀌고 있다. 혼다라는 강력한 변수가 가세하면서, 현대·기아의 하이브리드 SUV 전략은 검증과 동시에 더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