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순위 청약에 몰린 투기 수요의 민낯
규제 지연 속 서민 주거 기회는 뒷전

“무주택자 우선”이라는 말에 서민들은 기대를 걸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회를 잡은 쪽은 정작 다주택자와 투기 세력이었다.
정부가 내세운 ‘무순위 청약 제도 개편’은 시행조차 되지 못한 채 멈춰 섰고, 그 사이 서민들은 또 한 번 밀려나고 있다.
정부가 2월 발표한 개편안은 아직도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사를 받지 못해 시행이 지연되고 있다.
실수요자 보호는 멈췄고, 고가 아파트를 노리는 다주택자와 투기꾼들만이 무순위 청약의 ‘틈새시장’을 차지한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누구나 청약 가능”이라는 허점

현행 무순위 청약 제도는 일반 분양 이후 남은 잔여 물량을 대상으로 한다. 만 19세 이상이면 청약통장이 없어도 누구나 신청할 수 있어, 공평한 제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최근 세종시에서 열린 한 무순위 청약에선 시세 차익이 2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자 수많은 신청자가 몰려 시스템이 마비되기까지 했다.
단 4가구를 분양하는 데 수천 명이 몰린 상황에서, 정작 실수요자인 무주택자는 뒷전이었다. 당시 청약 신청 폭주로 홈페이지 접속조차 되지 않자, LH 측은 접수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 제도는 무주택자보다는 시세 차익을 노리는 자산가들에게 유리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규제 지연… 서민은 기다릴 뿐

국토교통부는 올해 3월, 무순위 청약 대상자를 무주택자로 제한하고 거주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개편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규제개혁위원회 심사가 지연되며 아직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심사 대기 중인 안건이 많아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며 “법제처 자구심사까지 마치면 바로 시행에 들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투기 수요는 여전히 무순위 청약에 참여하고 있다.
도시와경제 송승현 대표는 “주택 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무순위 청약이 오히려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다”며 “제도 개선 전까지 투기 세력의 진입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로또 청약’에 사라진 공정성

‘로또 청약’이라 불린 일부 단지에서는 위장전입 등 부정 행위가 횡행했다.
지난해 서울 서초구의 ‘래미안 원펜타스’는 1순위 청약에서 평균 52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이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41가구가 부정청약으로 적발됐다.
적발된 부정청약 대부분은 위장전입이었으며, 청담 르엘, 과천, 성남 등 수도권 주요 지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잇따랐다.
국토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청약 당첨자의 건강보험 요양급여 내역을 토대로 위장전입 여부를 정밀하게 확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청약에 성공하면 수억 원의 시세차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부정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당첨만 되면 로또”라는 인식이 투기를 부추기고, 무주택 서민들은 기회의 문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하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명분은 아직 현실에 닿지 못했다.
규제가 늦춰지는 사이, 투기 수요는 자리를 지켰고, 공정한 기회는 다시 한번 멀어졌다. 이대로라면, ‘무주택자 우선’은 그저 허울 좋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