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세월 쌓인 3,000개의 돌탑
사랑과 학문의 산, 노추산

가을이 깊어질수록 단풍의 붉은 결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과 정선의 경계에 선 노추산은 다른 색의 가을을 품는다. 돌과 바람, 그리고 한 어머니의 염원이 그린 길, 바로 노추산 모정탑길이다.
“돌 하나 올릴 때마다 기도를 올린 기분이었어요. 이 길은 단풍보다 마음이 먼저 물들어요.”
가을 휴일에 가족과 함께 찾은 한 사회복지사 연 씨는 돌탑 사이를 천천히 걷다가 한동안 발걸음을 멈췄다고 한다. 그는 돌과 나무 사이로 번지는 고요함 속에서, 세월이 켜켜이 쌓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느꼈다고 전했다.
노추산 모정탑길은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믿음이 돌 위에 새겨진 길이며, 오늘날에도 그 간절한 마음이 계곡을 따라 여전히 숨 쉬고 있다.
26년의 세월, 돌로 세운 어머니의 사랑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1679-8 일원에 위치한 노추산 모정탑길은, 한 어머니의 기도가 만든 길이다. 차순옥 여사는 1986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26년간 매일같이 돌을 쌓았다.
“집안의 평안을 위해 돌을 올리라”는 꿈속 계시를 믿고 시작한 일이었다. 잃은 두 아들과 병든 남편을 위해 손끝에 정성을 모은 결과, 그녀의 손에서 태어난 돌탑은 어느새 3,000개를 넘었다.
세월교를 건너면 시작되는 트레킹 구간은 왕복 약 1~2시간, 길이 1.2km로 완만해 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걷기 좋다. 이끼 낀 돌탑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는 속삭임처럼 잔잔해, 걷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이 길을 걸으면, 그 어떤 단풍보다 깊은 색이 마음속에 스며든다. 돌 하나, 탑 하나마다 어머니의 시간과 사랑이 고요히 쌓여 있다.
율곡 이이가 머문 학문의 산

노추산은 단지 모정탑의 산이 아니다. 해발 1,322m의 능선에는 학문과 사색의 이야기가 함께 흐른다. 산의 이름 ‘노추(魯鄒)’는 공자와 맹자의 나라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성현의 도를 품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다.
신라의 학자 설총과 조선의 대유학자 율곡 이이는 이 산에서 학문을 닦으며 인간의 도리를 탐구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이성대(二聖臺)’라는 목조 건물에 남아 있다.
이성대는 율곡의 후학들이 세운 제단으로, 매년 가을이면 지역 주민들이 제를 올리며 선현의 뜻을 기린다. 한쪽에서는 어머니의 사랑이, 다른 한쪽에서는 학자의 사색이 이어지는 노추산은 두 가지 정신이 공존하는 산이다.
정선군 여량면 노추산로 912-2 방면에서 출발하면 이성대를 지나 정상까지 오르는 본격적인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능선 위에서 내려다보는 송천의 물줄기와 단풍의 어우러짐은 장쾌한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위로와 사색이 머무는 가을의 길

노추산 모정탑길은 단풍철의 붐비는 산과 달리, 고요히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산책 코스다. 왕산면 대기리 1674-5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하면, 돌탑 체험장과 ‘소원 우체통’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며, 연중무휴로 개방되어 누구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다. 주변의 오토캠핑장에서는 밤하늘의 별과 계곡의 물소리가 이어지며, 자연 속 휴식이 완성된다.
짧은 길이지만 이 길은 단순한 트레킹이 아니다. 걷는 동안 차순옥 여사의 손끝이 남긴 돌 하나하나에 각자의 마음이 겹쳐지고, 그 간절함이 한데 모여 새로운 위로가 된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노추산을 찾는다면, 붉은 단풍보다 먼저 따뜻한 이야기들이 마음을 물들일 것이다. 세월을 견딘 돌탑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인간의 신념이 만든 가장 오래된 기도를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