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을 사칭한 범인의 전화를 받은 70대가 1억 원을 송금하려는 순간, 진짜 경찰이 현장에 나타났다. 보이스피싱 일당에 완전히 세뇌된 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을 구하러 온 형사를 거부했다.
“내가 왜 피해자냐”… 거부한 70대, 직접 얼굴 보고서야 믿다
지난 14일 오전 9시 50분, 제주 서귀포시에 사는 A 씨(70대)는 자신을 검찰이라고 주장하는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본인 명의 카드로 피해금이 30억 원이 넘는다, 자산 보호 및 검수를 해야 한다”며 악성앱 설치를 유도했다.
서귀포경찰서 피싱범죄전담팀은 경찰청에서 악성앱 피해 정보를 전달받아 통화 기록을 확인하고 한라산을 등반 중인 A 씨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A 씨는 피해가 없다며 경찰과의 만남을 완강히 거부했다.
전화로는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성수환·조현수 형사는 A 씨가 있는 한라산 어리목 주차장까지 직접 찾아갔다. 형사들의 얼굴을 직접 본 A 씨는 그제야 전화기를 넘겼고,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악성앱이 핵심 무기… 피해자는 이미 ‘원격 조종’ 상태
A 씨의 전화기는 이미 악성앱이 설치된 상태였고, 보이스피싱 일당이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경찰을 의심하고 범인을 신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사기 수법은 단순 전화 협박에서 벗어나 악성앱 설치, AI 음성 모방, OTP(일회성 비밀번호) 직접 요청 등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전국 보이스피싱 전체 건수는 2021년 약 3만 건에서 2025년 8월 기준 약 1만 6,000건으로 46% 감소했지만, 60대 이상 피해자 비중은 오히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고령층 피해, 줄지 않는다… 전국 피해자의 30%, 강원은 36%
전국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6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에 달하며, 강원도의 경우 2021년 20%에서 2025년 36%로 급증했다. 전체 범죄는 줄고 있지만 고령층만 집중 타겟이 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은 악성앱 설치 경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검찰·경찰 사칭에 높은 신뢰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사기 조직은 이 점을 정밀하게 파고든다.
예방이 검거보다 낫다… 제주경찰 18개월간 918건 출동
제주경찰청은 2024년 7월부터 악성앱 설치자 및 검찰 사칭 사이트 입력 피해자 정보를 경찰청으로부터 전달받아 현장에 직접 출동하는 예방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26년 1월 기준 918건을 출동해 8억 6,000만 원 상당의 피해를 사전에 차단했으며, 건당 평균 약 94만 원의 손실을 막은 셈이다.
성수환 형사는 “보이스피싱은 사후 검거보다 초기 예방이 중요하다”며 “의심 문자나 원격제어 요구는 즉시 차단하고, 악성앱 점검만으로도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이스피싱 피해는 줄어드는 게 아니라 더 정교하게, 더 약한 곳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 이번 제주 사건은 경찰의 적극적인 현장 대응이 실질적 피해 예방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준 사례다. 고령층을 향한 범죄가 고도화되는 시대에, ‘사후 검거’보다 ‘사전 차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