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함께 살았는데 수술 동의 못 한다”…비친족 가구 60만, ‘법 밖의 가족’ 현실 발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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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성 맹장염으로 쓰러진 동거인을 밤새 간호하고도, 수술 동의서에는 서명 한 줄 못 하는 현실이 있다. 10년 넘게 연락 한 번 없던 혈육이 다른 도시에서 올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만 했다는 실제 사연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낡은 ‘가족’의 틀에 갇혀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60만 가구, 법 밖의 가족

통계청에 따르면 혈연이나 혼인 관계 없이 함께 사는 5인 이하 가구인 ‘비친족 가구’는 2020년 42만 3,459가구에서 2024년 58만 413가구로 불과 4년 만에 약 36% 급증했다. 연인 간 동거, 동성 부부, 마음 맞는 친구 간 룸메이트 등 형태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혼인 외 출산 비율 역시 2020년 2.5%에서 2024년 5.8%로 두 배 넘게 뛰었다. 사회의 실제 풍경은 이미 급격히 바뀌었지만, 제도는 여전히 혼인신고서와 가족관계증명서라는 1970년대식 ‘정상 가족’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다.

비친족 가구가 급증한 현실
비친족 가구가 급증한 현실 / 연합뉴스

수술 동의도, 상속도, 돌봄 휴가도 없다

법적 가족은 배우자나 혈족이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수술 동의를 할 수 있고,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얻어 의료비 부담을 줄이며, 사망 시 상속과 장례 주관의 권리를 당연히 갖는다. 반면 비친족 가구는 10년을 넘게 한집에서 헌신하며 살아도 이 모든 권리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동거인이 아파도 돌봄 휴가나 병가를 낼 수 없고, 세액 공제나 신혼부부 공공주택 우선 분양 같은 혜택은 처음부터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세금은 똑같이 내고, 의무도 똑같이 다하는데’라는 이들의 울분은 단순한 불만이 아닌, 구조적 차별에 대한 정당한 항의다.

해외는 이미 답을 찾았다

프랑스는 1999년 도입한 시민연대협약(PACS) 제도를 통해 성별과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동거인에게 결혼에 준하는 세제 혜택과 건강보험 권리를 보장하며, 현재 연간 10만 건 이상 등록되는 안정된 제도로 자리 잡았다. 네덜란드는 등록 파트너십을 통해 혼인과 사실상 동일한 법적 효력을 부여하고, 스웨덴은 부모의 동거인에게까지 육아휴직 권리를 인정하며 다양한 형태의 돌봄을 국가가 뒷받침한다.

동거인 돌봄권 확대 요구
동거인 돌봄권 확대 요구 / 연합뉴스

한국에서도 동거인을 가족에 준하는 관계로 인정하는 ‘생활동반자법’과 비혼 여성의 보조생식술을 지원하는 ‘독립출산지원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그러나 동성혼 합법화 우려를 앞세운 종교계 일각의 반발과 보수적 정치 논리에 막혀 입법 논의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돌봄망 붕괴, 더 큰 사회적 비용이 온다

전문가들은 비친족 가구에 대한 법적 공백을 방치할 경우,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돌봄 체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합해 서로를 돌보겠다는 의지를 낡은 법이 가로막는 동안, 고독사와 각자도생이라는 훨씬 더 무거운 사회적 청구서가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23년 가족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80.3%가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 금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미 60만 가구가 넘는 시민이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살며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지금, 현실을 외면한 채 과거의 틀을 고수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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