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릴 땐 빨리 내릴 땐 천천히
‘사후정산제’가 원인
최고가격제 부활… 의견 엇갈려

서울의 한 주유소는 지난 8일 정유사로부터 휘발유를 리터당 1,900원, 경유는 1,950원에 매입했다.
하지만 이 가격은 아직 확정이 아니다. 주단위 또는 월단위 정산 시점에 정유사가 다시 한번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사후정산제’ 때문이다.
실제로 6일 기준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은 리터당 1,916.54원까지 치솟았으며, 2일부터 일주일 만에 약 200원이나 급등했다.
카드 수수료 30원까지 고려하면 주유소 입장에서는 정산 가격이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판매가를 넉넉히 책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주유소 업주는 “다음 주보다 다다음 주 가격이 더 높아진다고 보면 더 내릴 수가 없다. 돌려받을 게 거의 없을 테니까”라고 토로했다.
‘유가 급등의 증폭기’ 사후정산제의 민낯

사후정산제는 정유사가 초기 제시한 입금 가격으로 일단 거래를 진행한 뒤, 일정 기간 후 국제유가와 환율 변동을 반영해 최종 가격을 재산정하는 방식이다.
시세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유가 급등기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브렌트유가 107달러대를 기록하면서 정유사들은 매일 입금 가격을 올리고 있다. 정상적이라면 국제유가 상승 후 2~3주 뒤 국내 가격에 반영되지만, 현재는 시차 없이 즉각 반영되고 있다.
소비자 선구매로 재고가 빠르게 소진되는 데다, 정유사와 대리점이 과도한 마진율을 적용하면서 “올릴 땐 빨리, 내릴 땐 천천히”라는 비대칭적 가격 구조가 심화됐다.
2008년 공정위 판정도 막지 못한 ‘담합 의혹’

사실 사후정산제는 18년 전에도 문제가 됐다. 2008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제도를 부당한 거래 관행으로 규정하고 정유사에 시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은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손을 들어줬고, 이후 제도는 그대로 유지됐다.
공정거래 카르텔 조사국은 지난주 기름값 급등의 배경에 담합 의혹이 있다고 보고 정유사 4곳에 대한 현장 조사에 착수했다.
특히 정유사들이 전쟁 직후 ‘즉각적으로’ 공급 단가를 인상한 점, 비축 물량이 전쟁 이전 수입분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올린 점 등이 조사 대상이다.
30년 만의 ‘최고가격제’ 부활…실효성 논란은 여전

정부는 지난 9일 석유최고가격제 시행을 발표했다. 1990년대 이후 약 30년 만의 부활이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는 “상한선을 설정해도 원가가 이를 초과하면 정유사와 주유소 모두 마진을 잃는 구조가 될 수 있다”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업계에서는 사후정산제 자체에 대한 법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가 하락기에는 시장 원리에 맡기다가 급등기에만 정부가 개입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환율 상승까지 겹쳐 이중고가 예상되는 만큼, 가격 결정 메커니즘 전반에 대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