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억원 PBL 계약 체결
30년간 방산 협력 가능성
48조원 규모 추가 도입 선언

최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필리핀 국방부와 1,014억원 규모의 3년 장기 성과기반군수지원(PBL)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2024년 12월 단기 시범계약(270억원) 이후 불과 두 달 만에 이뤄진 본계약으로, 필리핀이 보유한 FA-50PH 전투기 24대의 안정적 운용을 위한 핵심 조치다.
항공기 획득비의 2~5배에 달하는 후속지원 비용을 고려하면, 이번 계약은 향후 20~30년간 수조원대 방산 협력의 시작점이 될 전망이다.
더 주목할 점은 필리핀이 향후 10년간 48조원 규모의 추가 무기 도입을 선언하며, 그 첫 번째 공급자로 대한민국을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필리핀이 수입하는 전체 무기의 33%가 한국산이다. 하늘에는 FA-50 전투기가, 바다에는 HD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호세 리자람급 호위함이, 땅에는 한국산 장갑차가 배치돼 있다.

필리핀은 폴란드에 이어 한국 무기를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구매하는 국가가 됐다.
이러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태국 다음으로 빠르게 전투병력 7,400명을 파견했고, 112명이 전사했다.
한국은 1990년대부터 이 은혜를 갚듯 노후 F-5 전투기, UH-1H 헬기 등을 무상 또는 상징적 금액으로 이전했다. 단순히 장비만 준 게 아니었다.
한국은 필리핀 정비사를 국내로 불러 교육하고, 한국 기술자를 현지에 파견하며 ‘한국식 생태계’를 심었다. 2009년 양국 특정 방산물자 조달 협정 체결로 복잡한 국제입찰 없이 직접 구매 가능한 체계가 완성됐다.
실전이 증명한 FA-50의 가치

2014년 필리핀은 연간 국방예산 23억 달러(약 3조3천억원)라는 제한된 재원으로 전투기 도입을 결정했다.
F-16은 대당 5천만 달러 이상에 인도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FA-50은 대당 3천만 달러로 절반 가격이었고 3년 만에 12대 전량이 인도됐다.
결정적 순간은 2017년 5월 민다나오섬 마라위시에서 찾아왔다. IS 추종 극단주의 세력이 도심을 점령하자 FA-50이 투입돼 약 70소티를 출격, 정밀 폭격으로 민간 피해를 최소화하며 전황을 뒤집었다.
필리핀 지상군 사령관은 FA-50을 “전장의 게임체인저”라고 평가했다.
이 실전 성적표는 글로벌 방산 시장을 흔들었다. 폴란드가 48대를 도입했고, 말레이시아·이라크·콜롬비아가 줄을 섰다. 현재 FA-50은 6개국에 150대 이상 수출됐으며, 필리핀은 2025년 추가로 12대를 주문했다.
기존 11대에 대한 성능개량 사업(930억원)도 동시 진행 중으로, 미 북산 팬텀 스트라이크 레이더와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운용 능력이 추가돼 경전투기에서 준전투기 수준으로 격상된다.
남중국해 분쟁, 필리핀의 절박함

필리핀의 군사력 증강 배경에는 남중국해 분쟁이 있다. 면적 350만㎢, 전 세계 해상무역량의 3분의 1이 통과하는 이 바다에서 중국은 구단선(9단선)을 그어 90%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중국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며 무시했다. 특히 필리핀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집중 압박 대상이 됐다.
충돌은 일상이 됐다. 2023년 12월 스프래틀리 군도 인근에서 중국 해경선이 물대포를 쐈고, 2024년 6월에는 세컨드 토머스 사주에서 필리핀 보급선을 들이받아 해군 병사의 손가락이 절단됐다.
지난해 10월에도 중국 선박이 필리핀 어업선을 고의 충돌시키자 미 국무부가 직접 규탄에 나섰다.

필리핀 내에서는 중국 대사 추방론이 제기됐고, 중국이 “수백만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 협박하자 필리핀 외교부는 “경제를 보복 수단으로 삼는 강압”이라며 정면 반박했다.
더 충격적인 건 2000년대 중반 필리핀 공군에는 작동하는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10년 넘게 노후 훈련기 몇 대로만 하늘을 지켰고, 해군은 2차 세계대전 때 받은 태역함이 주력이었다.
중국이 수비암초·피어리 크로스 암초 등을 매립해 여의도의 10배 규모(약 30㎢) 인공섬에 3,000m급 활주로와 대공미사일 기지를 세우는 동안, 필리핀은 녹슨 배로 바다를 지켜야 했다.
PBL 체계가 만든 선순환, 그리고 미래

이번 PBL 계약의 전략적 의미는 단순 정비 지원을 넘어선다. PBL은 항공기 가동률과 정비 신뢰도 등 ‘성과’를 기준으로 30~40년 수명주기 전반을 책임지는 선진국형 군수지원 체계다.
KAI는 2010년부터 약 15년간 한국 공군의 KT-1, T-50, 수리온에 PBL을 적용해온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필리핀은 초기 항공기 수출 → 안정적 후속지원 → 추가 도입 → 성능개량 사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모델을 정착시켰다.
한국 방산의 글로벌 입지도 급상승 중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LIG넥스원, KAI, 현대로템 등 방산 4사의 2026년 연간 합산 영업이익은 6조 6,522억원으로 사상 최고 수준이 전망된다.
2025년 4월 태국에도 FA-50 PBL 계약을 체결했고, 페루와는 해군 함정을 포함한 대규모 방산 패키지 계약을 맺었다.
2026년 2월 사우디 국제 방산 전시회에는 국내 39개 업체가 K-9 자주포, KF-21 전투기, 3,000톤급 함정을 전시하며 중동 시장 공략에 나섰다.

다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KF-21 500대 수출 계약’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 공식 수출 계약은 단 1대도 체결되지 않았으며, UAE와 필리핀 등이 홍보 단계에 있을 뿐이다.
본격 수출은 공대공·공대지 임무를 모두 수행 가능한 블록2 전력화 이후로 예상된다. 과장된 보도는 오히려 향후 입찰에서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다.
필리핀은 약속한 날짜에 무기가 도착하고, 실전에서 검증됐으며, 30년 후까지 책임지는 파트너인 한국을 선택했다. 48조원 시장의 문이 열렸고, 그 열쇠는 신뢰였다.
HD 현대중공업은 코로나 한가운데서도 호위함을 예정보다 빨리 인도하며 마스크와 방역 물품까지 실어 보냈다. 납기 지연이 고질병인 방산업계에서 ‘약속을 지키는 나라’라는 평판은 어떤 카탈로그보다 강력하다.
필리핀이 한국을 택한 이유는 성능이 아니라 신뢰였고, 그 신뢰가 지금 48조원짜리 미래를 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