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기차가 유럽 관세 장벽을 정면 돌파하는 대신, 아예 유럽 땅에 공장을 세우는 승부수를 띄웠다. 최고 45.3%에 달하는 EU의 징벌적 관세를 단번에 무력화하는 전략으로, 한국 자동차 업계는 물론 유럽 완성차 진영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미 중국 브랜드의 유럽 내 전동화 차량 점유율은 14~16%대까지 치솟은 상태다. JP모건은 2026년 5월 기준 보고서에서 2028년이면 이 수치가 20%를 넘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페인 사라고사 공장, 중국차의 새 본진으로
다국적 자동차 그룹 스텔란티스와 중국 전기차 업체 리프모터는 스페인 사라고사 공장에서 준중형 SUV ‘B10’을 비롯해 오펠 브랜드 신형 전기차를 공동 플랫폼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과거 폴란드 공장에서 소형차 T03를 소규모로 조립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유럽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준중형 SUV 시장에 본격 진입한 것이다.
중국 현지에서 생산해 유럽으로 수출하면 최고 45.3%의 관세를 맞아야 하지만, 스페인 공장에서 출고되는 순간 이 차들은 완전한 ‘유럽산’으로 인정받는다.
프리미엄 브랜드 홍치(Hongqi) 역시 같은 사라고사 공장에서 스텔란티스와 위탁 생산 협약을 맺고 2028년까지 12종 이상의 전동화 모델을 유럽 시장에 투입할 계획이다.
“유럽차 탈 쓴 중국차”…구조적 역설
겉은 수십 년간 친숙한 유럽차 브랜드이지만, 속은 원가를 극한까지 낮춘 중국산 배터리와 플랫폼으로 채워지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배터리·모터·전자제어장치 등 핵심 부품은 중국에서 수입하고, 유럽 현지에서는 최종 조립만 수행하는 이른바 ‘키트 공정’ 구조다.
관세 부담을 털어낸 것은 물론, 프랑스·이탈리아처럼 생산지 요건을 까다롭게 따지는 국가의 보조금 혜택까지 고스란히 챙길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된 셈이다. 스텔란티스의 촘촘한 유럽 딜러망과 애프터서비스(AS) 인프라까지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중국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의 품질 불안과 부품 수급 우려도 동시에 해소된다.
코나·니로 EV, 가격 전선 위기…한국차 기로
유럽 소형·준중형 전기차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온 현대차 코나 일렉트릭과 기아 니로 EV가 직접적인 타격 대상이다. 비슷한 세그먼트에서 현지 생산으로 관세를 면제받은 리프모터 합작 전기차가 수백만 원 이상 낮은 시작 가격을 제시한다면, 기존 고객조차 계산기를 다시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격 출혈 경쟁은 중고차 감가율에도 직결된다. 중국산 저가 전기차 대량 유입은 한국차의 잔존 가치 우위를 잠식하고, 리스 및 금융상품의 조건까지 악화시키는 연쇄 효과를 낳는다. 결국 현대·기아는 브랜드 프리미엄을 앞세워 수익성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보급형 전기차 물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점유율 방어에 나설 것인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유럽 안방에서 시작된 전기차 치킨게임은 단순한 가격 경쟁을 넘어, 누가 더 빨리 현지화 생태계를 장악하느냐의 싸움으로 진화했다. 관세 장벽이 사실상 무력화된 지금, 한국차 진영의 다음 수가 어디를 향할지 업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