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나빠진 게 뇌 탓이 아니었다”… …’뱃속 세균’이 진짜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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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열쇠를 어디 뒀더라”, “그 사람 이름이 뭐였지.” 나이가 들며 반복되는 이 말, 뇌가 늙어서가 아닐 수 있다. 기억력이 나빠지는 진짜 원인이 뱃속에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의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의대와 아크연구소(Arc Institute) 연구진은 나이에 따른 기억력 저하가 뇌 자체의 노화가 아니라, 장내 미생물 변화가 유발하는 염증이 뇌와 장을 연결하는 신경 경로를 손상시킨 결과라는 메커니즘을 밝혔다. 이 연구는 2026년 3월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장과 뇌는 ‘미주신경’이라는 신경 다발로 연결돼 있으며, 장은 이 경로를 통해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에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연구진은 나이가 들수록 장내 세균 구성이 바뀌면서 이 신호 경로가 끊기다시피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어린 쥐도 ‘노인 기억력’으로 전락

연구진이 쥐 실험으로 추적한 결과, 나이 든 쥐일수록 장내에 ‘파라박테로이데스 골드스테이니(Parabacteroides goldsteinii)’라는 세균이 크게 늘어났다.

어린 쥐의 장에 이 세균만 주입하자 멀쩡하던 기억력이 노령 쥐 수준으로 뚝 떨어졌고, 반대로 항생제로 이 세균을 제거하자 노령 쥐의 기억력이 되살아났다.

노령 쥐와 어린 쥐를 같은 우리에서 함께 키웠더니, 배설물 등을 통해 세균이 교환되면서 어린 쥐의 기억력도 나이 든 쥐처럼 나빠졌다. 기억력 저하가 단순한 뇌 노화가 아니라 장내 세균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

장을 고치면 기억이 돌아온다

더 주목할 점은 이 과정이 되돌려진다는 사실이다. 연구진은 문제 세균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바이러스(박테리오파지)를 투여해 기억력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비만 치료제 오젬픽·위고비와 같은 계열의 약물을 노령 쥐에게 투여했을 때도 끊겼던 장-뇌 신호가 되살아나며 기억력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으로 미주신경을 자극했을 때도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교신저자인 크리스토프 타이스(Christoph Thaiss) 스탠퍼드대 병리학과 교수는 “위장관의 조성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기억 형성과 뇌 활동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장은 뇌를 위한 일종의 리모컨”이라고 밝혔다. 공동 교신저자인 마얀 레비(Maayan Levy) 교수도 “위장관은 입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장내 환경 조절은 뇌 기능을 제어하는 매력적인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이 연구는 동물실험 단계이며, 인간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지 확인하려면 추가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 간질이나 뇌졸중 치료에 쓰이는 미주신경 자극술을 받은 환자들에서 인지 기능이 향상됐다는 기존 보고가 있어, 인간 적용 가능성에 기대가 모인다. 100세까지 머리가 맑은 사람과 50대부터 기억력이 급격히 나빠지는 사람의 차이가 뇌가 아닌 장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이 연구는, 기억력 저하를 ‘뇌의 숙명’으로만 여겨온 시각을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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