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직장 현장을 바꾸고 있다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AI가 도입됐어도 업무량은 줄지 않고, 오히려 사람만 잘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인 절반 이상 “AI 도입 후에도 일은 그대로”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4.1%가 ‘AI 기술 도입 후에도 업무량에 변화가 없었다’고 답했다. 오히려 업무량이 ‘늘었다’는 응답은 26.7%로, ‘줄었다’는 응답 19.1%를 크게 웃돌았다.

AI가 업무를 덜어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실제 노동 현장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효율화’라는 명분 뒤에 가려진 노동 강도의 실상이 수치로 드러난 것이다.

채용은 줄고, 부담은 남은 인력이 떠안는다
AI 기술을 공식 도입한 이후 채용 규모가 줄었다고 느끼는 응답자는 52.4%에 달했다. 기업들이 AI 도입을 이유로 신규 채용을 줄이면서, 기존 직원들은 더 적은 인원으로 동일하거나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AI 기술을 업무에 공식 도입했거나 도입 진행 중인 기업에 재직 중이라는 응답도 47.1%로 절반에 육박했다. 기업의 AI 전환 속도는 빠르지만, 그 혜택이 노동자에게는 고스란히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연령·고용 형태별 격차도 심각
AI 도입에 대한 인식은 연령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현재 AI를 도입하고 있다’는 응답은 20대가 14.3%로 가장 높았고, 30대 10.3%, 40대 7.7%, 50대 4.5% 순으로 연령이 높을수록 낮아졌다. 젊은 세대일수록 AI 변화의 최전선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고용 형태별 정보 격차도 심각하다. ‘AI 도입 여부를 모르겠다’는 응답이 비정규직에서 24.3%, 비사무직에서 22.4%, 비조합원에서 17.1%에 달해,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AI 도입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 취약 계층은 AI 전환의 흐름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있다는 뜻이다.
정책은 ‘효율화’ 외치는데…현장은 ‘인력 축소’만 체감
김병욱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채용·인사 분야에 도입되는 AI는 사람의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AI’로 분류된다”며 “정작 이 기술에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정책 설계 단계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AI 기본법이 고영향 AI에 대한 규제 근거를 담고 있음에도, 실제 노동 현장 보호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다.
AI 전환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노동자가 체감하는 현실과 정책 담론 사이의 간극은 더 커지고 있다. ‘삶의 질 향상’이라는 정책의 약속이 현장에서 실현되려면, 기술 도입의 방향과 속도를 노동자 관점에서 재설계하는 논의가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