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은퇴 후 ‘자기 삶’ 우선
손주 돌봄 비자발적 참여 72% 달해
돌봄수당 확대에도 가치관 변화 뚜렷

“평생 일만 하다 은퇴했는데, 이제는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서울 강남구에 사는 김모씨(63)는 맞벌이 딸의 손주 돌봄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새로운 선택을 하고 있다. 당연히 받아들여지던 ‘손주 돌봄’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우선하는 시니어가 늘고 있는 것이다.
비자발적 돌봄, 침묵의 고통

황혼육아의 이면은 생각보다 어둡다. 한국리서치가 수도권 55세 이상 황혼육아 조부모 302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2%가 손주 육아에 비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답했다. 맞벌이 자녀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주를 돌보게 됐다는 의미다.
이들은 평균 주 3회 이상, 하루 6.8시간을 손주 돌봄에 할애했다. 노년층이 따로 사는 손자녀를 돌보는 데 투입한 노동 가치만 연간 3조1000억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66세 1인당 가사 노동 생산액이 1205만원으로 증가한 것은 손주 돌봄이 주된 원인이다.
정책은 늘어나도 거부는 계속된다

정부와 지자체는 조부모 돌봄수당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서울·경기·경남·광주 등에서 월 20만~30만원의 수당을 지급하며, 2025년부터는 지원 대상도 넓어졌다. 경남은 다자녀 조건을 삭제했고, 경기는 48개월까지 지원 연령을 확대했다.
하지만 돌봄수당만으로는 시니어 세대의 가치관 변화를 막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조부모 육아휴직 제도 도입은 돌봄 부담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라며 “공적 돌봄 확충이 정공법”이라고 지적한다. 월 30만원으로 자유와 건강, 여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시니어들의 솔직한 심경이다.
은퇴 후 설계, 손주가 아닌 ‘나’를 위해

1955년부터 1963년 사이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700만명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이들의 노후 설계도 달라지고 있다. 이전 세대와 달리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력을 갖춘 이들은 은퇴 후에도 자기계발, 여행, 취미생활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문제는 이들 세대가 ‘샌드위치 세대’라는 점이다. 위로는 부모 부양, 아래로는 자녀 양육이라는 이중 부담을 겪었지만, 정작 자신은 자녀에게서 부양받지 못하는 세대다. 평균수명 연장으로 은퇴 후 생존 기간이 20년 이상 늘어나면서, 한정된 자산으로 긴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현실도 손주 돌봄 거부의 배경이 된다.
실제로 베이비부머의 실질 은퇴 나이는 73세로 OECD 평균(남성 65.4세)을 크게 웃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은퇴 후에도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손주 돌봄까지 떠맡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세대 간 인식 차이, 대화로 풀어야

손주 돌봄을 둘러싼 세대 간 갈등은 가족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친손주라는 의식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주 양육자인 엄마가 더 편한 친정 쪽에 육아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조부모 입장에서는 외손주든 친손주든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돌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손주의 연령과 양육 보조자 유무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유아기 손주를 혼자 돌보는 ‘독박육아’는 시니어의 체력을 급격히 소진시킨다. 최신 육아법에 대한 정보 부족도 자녀 세대와의 갈등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제는 시니어 세대가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시대다. 손주 돌봄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되면서, 가족 간 솔직한 대화와 상호 존중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정부는 공적 돌봄 인프라를 확충하고, 가족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며, 시니어는 자신의 노후를 주체적으로 설계하는 것. 이것이 손주 돌봄을 둘러싼 세대 갈등을 풀어갈 현실적인 해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