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철학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은 ‘1등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압축된다. 이 원칙이 1970년대 말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의 운명을 좌우했다.
당시 플라자호텔 도원에 밀린 팔선은 폐업 위기에 처했지만, 한 셰프의 요리 실력이 이 회장의 결정을 완전히 뒤바꿨다.
사업보국과 인재제일, 이병철의 이중 원칙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은 ‘사업보국(事業報國)’과 ‘인재제일(人材第一)’로 요약된다.
1975년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한 개인을 위한 기업은 망하고 만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동시에 인재 양성에 일생의 80%를 쏟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철학은 역설적으로 1등이 아닌 사업에 대한 냉정한 판단으로 이어졌다. 팔선이 경쟁사에 뒤처지자 폐업 지시를 내린 것도 이 원칙의 연장선이었다.
위기의 팔선, 후덕죽의 등장

1970년대 후반 신라호텔 팔선은 플라자호텔 도원과의 경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병철 회장은 “1등이 아니면 안 하는 게 낫다”며 폐업을 지시했다.
전환점은 당시 부주방장이던 후덕죽이 주방장으로 승격되면서 찾아왔다. 1968년 UN센터호텔에서 요리업계에 입문한 후덕죽은 1977년 신라호텔 개관 멤버로 합류해 1979년 팔선 초대 주방장이 됐다.
이 회장의 큰딸이 후덕죽의 음식을 맛본 뒤 “음식 맛이 달라졌다”며 아버지에게 재방문을 권했다. 처음에는 “문 닫으라고 한 데를 뭐 하러 가보냐”고 했던 이 회장이었지만, 딸의 거듭된 요청에 팔선을 방문했다.
한 끼 식사가 바꾼 운명

이병철 회장은 후덕죽의 음식을 맛본 뒤 “완전히 달라졌다”고 평가하며 폐업 지시를 철회했다. 경영 원칙만큼이나 인재에 대한 안목을 중시했던 그의 철학이 발현된 순간이었다.
후덕죽은 이후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자 중국과 일본을 직접 다니며 약선요리를 연구했다. 폐 질환으로 식사를 못하던 이 회장을 위해 중국 약선요리 전문점을 찾아 나섰고, 문을 닫은 식당을 일본까지 추적해 조리법을 습득했다.
지배인이 쫓아내려 하자 주방장 퇴근 시간인 밤 10시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사정을 설명해 이해를 구했다는 일화는 그의 장인정신을 보여준다.
이병철이 남긴 유산, 1등 중식당

이병철 회장의 결단은 한국 중식의 역사를 바꿨다. 폐업 위기를 넘긴 팔선은 이후 국내 최고 중식당으로 자리매김했고, 후덕죽은 1994년 호텔신라 이사로 승진하며 국내 호텔 중식 조리사 최초로 임원이 됐다.
이 회장 사후에도 그가 살린 팔선의 명성은 이어졌다. 1995년 장쩌민 중국 주석이 방한했을 때 후덕죽의 요리를 맛본 장 주석은 “중국 본토 요리보다 훌륭했다”고 평가했다.
2000년 팔선은 신지식인이 뽑은 아시아 베스트 5 식당에 선정됐으며, 오늘날까지 신라호텔의 대표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1등 아니면 하지 않는다’던 이병철의 원칙이 결국 진정한 1등을 만들어낸 셈이다.
후덕죽은 1977년부터 2019년까지 42년간 팔선을 지켰고, 현재는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총괄셰프로 재직 중이다.
최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에 출연해 80대의 나이에도 톱3에 오르며, 이병철이 알아본 그 재능이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증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