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기술자’ 이근안 사망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들을 전기고문으로 쓰러뜨리던 사람이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 기술자’라는 별칭으로 역사에 새겨진 이근안 전 경감이 2026년 3월 25일, 건강 악화로 입소해 있던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숨졌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부고(訃告)가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사 진실규명의 문이 또 하나 닫혔음을 의미한다.
전기고문에서 내무부 장관 표창까지
이근안은 1970~80년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으로 활동하며 전기고문 등 가혹 행위를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낸 인물로 알려졌다.
남민전 사건, 1985년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 고문 사건, 이른바 ‘서울대 무림사건’ 등 굵직한 공안 사건에 잇따라 연루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81년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고문이 ‘조직 문화’로 내재화된 시대, 가혹 행위는 곧 ‘수사 실적’으로 포장됐다.
김근태 고문 사건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 중 하나로 평가된다. 피해자 김근태는 훗날 정치인으로 활동했지만, 고문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았다. 이근안이 관여한 사건들은 단순한 수사 기록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상흔 그 자체다.
12년 도피·자수·징역 7년…그리고 목사 안수
민주화 이후 과거사 정리가 시작되자 이근안은 1988년 수배됐다. 그는 무려 12년간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1999년 자수했다. 고문 및 불법 구금 혐의로 기소된 그는 대법원에서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피해의 심각성에 비해 형량이 낮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출소 후 이근안은 목사 서품을 받고 종교 활동을 이어갔다. 공개 간증에서 “과거를 반성한다”고 밝혔지만, 진정성은 처음부터 의심받았다.
자서전에서 “간첩과 사상범을 잡는 것은 애국이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고,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묘사가 “과장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는 끝내 책임 있는 참회를 받아내지 못했다.
‘증인 소실’이 남긴 과제

역사학계와 인권단체는 이근안의 사망을 ‘증인 소실’로 규정한다. 1970~80년대 고문 수사의 구체적 진상을 알고 있는 당사자들이 고령으로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진실규명의 기회가 좁아지고 있다.
유엔 특별보고관도 한국의 과거 인권침해 책임자 소추율이 낮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근안 사건은 ‘전환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 실패 사례로 국제 기록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
독일이 나치 전범을 수십 년이 지나서도 끈질기게 추적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가해자의 구체적 증언을 확보했던 것과 비교하면, 한국 사회의 과거사 청산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이근안의 죽음은 그 공백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드러낸다. 진실은 가해자의 자연사(自然死)와 함께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그의 죽음이 남긴 가장 무거운 숙제다.




이 악마구리 짐승이 천수를 누리다니… 부관참시를 해도 모자를 인간이다 하느님이 저주하사 지옥불에서 고통속에 영원히
지욱에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