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미국이 자국 조선 산업이 아닌 한국 기업에 핵심 연구개발(R&D)을 맡겼다. 그것도 함정의 생존 능력을 실시간으로 예측하는 인공지능(AI) 모델 개발이라는, 미래 해군력의 두뇌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HD현대는 2026년 4월 23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위치한 미 해군연구청(ONR) 청사에서 함정 성능 개선 및 건조 생산성 제고를 위한 연구과제 2건을 국내 기업 최초로 수주했다.
ONR은 미 해군과 해병대의 미래 과학기술 역량 개발을 총괄하는 핵심 연구기관으로, 미국 방위 기술 생태계의 최상단에 위치한 조직이다.
이번 계약의 의미는 단순한 수주 실적을 넘어선다. 과거 한국의 대미 함정 협력이 유지·보수·정비(MRO)나 제한적 선체 건조 참여에 머물렀다면, 이번에는 함정 설계의 출발선인 성능 예측과 공정 시뮬레이션 연구를 직접 주도하게 됐다.

AI로 군함의 생존을 계산하다
HD현대중공업과 서울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김용환 교수 연구진은 첨단 디지털 선박 기술을 기반으로, 거친 해양 환경 속에서 군함의 생존 가능성을 실시간으로 예측하는 AI 모델을 공동 개발한다. 이는 함정이 실제 전장 환경에서 어떤 손상을 입어도 즉각적으로 대응 시나리오를 도출할 수 있는 디지털 두뇌를 함정에 심는 작업이다.
HD한국조선해양 미래기술연구원은 별도의 과제로 미 해군의 함정 건조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공정 혁신 연구를 전담한다. 미국이 핵잠수함부터 이지스함까지 극심한 건조 지연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첨단 제조 기술이 직접 처방전으로 투입되는 셈이다.
미국이 한국에 손을 내민 진짜 이유
미 해군이 자국 조선소를 건너뛰고 HD현대를 선택한 배경에는 냉엄한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은 숙련공 부족과 노후화된 조선 인프라로 인해 전략 함정의 건조 일정이 연이어 지연되는 구조적 위기를 안고 있다.

반면 한국 조선업은 압도적인 상선 건조 물량을 기반으로 스마트 야드 구축과 선박 자율운항 데이터 축적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쌓았다. HD현대의 디지털 트윈 역량과 AI 설계 기술은 미 해군이 자국 산업 생태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K-해양방산, 글로벌 판도 바꿀 ‘보증수표’ 쥐다
주원호 HD현대중공업 사장은 “HD현대의 기술력이 인정받아 미국과 함정 분야 협력을 더욱 확대해 나가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미국의 엄격한 보안 심사와 까다로운 기술 요구도를 통과하며 R&D 파트너로 공식 인정받은 이 실적은, 향후 첨단 해군력 건설을 추진 중인 호주·캐나다 등 서방권 국가와의 함정 수출 협상에서도 압도적인 경쟁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HD현대가 미 해군의 함정 설계 밑그림을 함께 그리는 파트너 지위를 확보한 것은, 한국 방위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근본적으로 재편됐음을 의미한다. 세계 해상 패권국의 고민을 소프트웨어 역량으로 풀어주며 기술 동맹으로 자리 잡은 K-조선의 새로운 궤도가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